길 잃은 치매 노인, 동네 가게가 지킨다

매일 치매 노인 실종 문자가 뜬다. 치매 환자가 길을 잃었을 때 동네 약국이나 편의점이 따뜻한 안내자가 되어줄 수 없을까? 치매안심가맹점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제도로, 치매 환자와 가족이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치매 친화 환경 조성’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다. 공공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일상에서 치매 안전망 역할을 한다.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된 약국 / 정책브리핑 www.korea.kr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된 약국 / 정책브리핑 www.korea.kr

 

지역 내 치매 안전망, 치매안심가맹점

치매안심가맹점은 치매 환자에게 친화적인 공간으로 지정된 지역 내 사업장이나 기관을 뜻한다. 약국, 편의점, 미용실, 세탁소, 병원, 이발소 등 다양한 일상 기반 업종이 포함되며, 각 지역의 치매안심센터가 교육과 현장 점검을 통해 지정한다.

가맹점은 실종 치매 노인을 발견하면 임시 보호하고, 치매안심센터나 경찰에 신속히 연계하는 역할을 한다. 배회·기억장애가 있는 치매 노인이 생활하는 동네에서 장보기·외출 등 일상생활을 할 수 있고 길을 잃어도 치매안심가맹점의 보호·신고로 112에 연계해 무사히 귀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치매안심가맹점은 각 시·군·구 보건소 산하의 치매안심센터에서 지정한다. 치매안심센터는 신청을 받은 지역 내 사업장에 대해 종사자 교육, 현장 점검 등을 거쳐 지정 여부를 결정하며, 지정 후에는 스티커 부착과 함께 치매환자 응대 요령 등을 지속적으로 안내한다. 이 과정은 보건복지부와 중앙치매센터의 정책 지침에 따라 운영된다.

이 제도는 중앙정부가 일괄적으로 시행한 정책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실정에 맞게 자율적으로 도입하고 운영하면서 점차 확산된 사례로 평가된다.

가맹점의 중요한 역할은 길을 잃거나 위급한 상황에 처한 치매 환자를 발견하면 치매안심센터나 경찰에 신속하게 연계하는 것이다. 실제로 가맹점 직원들의 도움으로 안전하게 귀가한 치매 환자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한 점주는 “교육을 받고 나서부터는 어르신의 행동을 더 유심히 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치매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하게 됐다”고 한다. 이는 치매 인식 개선은 물론, 지역 내 자연스러운 관심 유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강원도 양구군 양구제빵소의 치매안심가맹점 지정 현판식 / 양구군치매안심센터
강원도 양구군 양구제빵소의 치매안심가맹점 지정 현판식 / 양구군치매안심센터

 

지자체별 지정 확대…그러나 관리 미흡도

2019년 실제로 일어났던 사례로, 치매에 걸린 노인이 한 편의점을 방문했는데 근무자가 치매 환자의 이상 행동을 보고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 후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치매 어르신을 보호했고, 눈치 빠른 근무자 덕분에 그 어르신은 무사히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미담을 계기로 보건복지부는 치매 환자 실종 예방과 조기 발견을 위해 ‘치매 환자 실종 예방사업’을 추진했고, 치매안심가맹점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지역 치매 안전망 강화에 나서기 위해 2021년 8월, 치매안심가맹점 제도 도입의 첫 사례가 지정됐다. 인천 미추홀구 등 여러 지자체에서 치매안심가맹점 지정이 확산됐다.

거제시는 올해 100개소를 신규 지정해 총 492개소를 운영 중이고, 서울 송파구는 73개소를 추가해 현재 79개소를 지정했다. 경기도는 약 1,276개소, 경상남도는 171개소를 운영 중이다. 대구 수성구, 강원 정선군, 경북 청송군 등에서도 가맹점 지정이 진행되면서 지역별 확산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일부 가맹점은 지정 이후 실질적인 활동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교육을 받았더라도 이후 점주나 종사자가 바뀌면서 제도의 취지가 현장에서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다. “스티커는 붙어 있지만 역할은 없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제도의 실효성은 공공의 손길이 닿기 어려운 일상에서 안전망으로 작용할 때 발휘된다. 동네 가게들이 치매 친화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사회적 편견을 줄이는 데 기여하자는 목표를 지녔으나, 지속적인 교육과 관리, 지역 주민과의 유기적인 연계가 뒷받침되어야 제도의 내실을 다질 수 있다.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된 편의점 현판식 / 의정부시
치매안심가맹점으로 지정된 편의점 현판식 / 의정부시

 

치매 친화 사회를 위한 생활 밀착형 해법

정부는 ‘제4차 치매관리종합계획(2021~2025)’을 통해 ‘치매 환자가 함께 살기 좋은 환경 조성’이라는 방향을 정하고, 치매안심센터 중심의 지역사회 자원 연계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웠다. 치매안심가맹점 제도는 공식 계획에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이 같은 방향성에 따라 각 지자체 치매안심센터를 통해 운영되고 있는 사업이다.

2026년부터 시행될 제5차 치매관리종합계획에서는 조기 진단, 돌봄 확대, 안심센터 기능 강화 등이 강조될 전망이다.

‘치매 친화 사회(Dementia-Friendly Community, DFC)’ 개념은 2012년 스코틀랜드 머더웰(Motherwell)에서 처음 실천된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정부 산하의 사회적 기금인 라이프 체인지 트러스트(Life Changes Trust)의 지원 아래 전국 40여 개 지역에서 치매 친화 사회 조성 사업을 추진했다.

머더웰에서 운영되는 250개 이상의 상점과 기업 및 단체 가운데 치매인들이 중요하다고 말한 대표적인 20여 개를 치매 친화 장소로 선정해 DFC 로고를 부여했다. 대상 목록에는 슈퍼마켓, 공공 주택, 안경점, 축구 클럽, 스포츠 센터, 도서관, 간병인, 신탁, 노인 단체, 약국, 소방 및 구조 서비스, 경찰, 상담 센터 등이 포함됐고, 관계자는 치매 이해를 주제로 한 전문 교육을 이수했다.

머더웰에서 DFC 로고가 부착된 곳은, 조정 위원회 구성과 실행 계획 수립, 정기 보고 및 자체 평가 등 인증 요건을 충족해 치매 친화적 환경을 실질적으로 갖춘 장소로 인정받으며 치매 환자와 가족이 안심하고 방문하는 일상 속 거점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머더웰의 상점에 있는 Dementia Friendly Community (DFC) 로고 / Scotland's first dementia friendly community
머더웰의 상점에 있는 Dementia Friendly Community (DFC) 로고 / Scotland's first dementia friendly community

 

스코틀랜드는 2년간의 DFC 실증 평가 결과, 치매 환자와 가족의 외로움 감소, 지역사회 참여 확대, 심리적 안정성 향상 등 삶의 질 전반에 긍정적인 효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머더웰 지역에서는 슈퍼마켓, 공공기관, 의료기관, 주민이 협력하여 치매 환자를 돕는 구조를 형성했고, 점원의 친절한 대응으로 안전하게 귀가한 사례가 늘어났다.

이 사업은 치매 환자뿐 아니라 가족 돌봄자(family carers)의 삶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지역사회가 돌봄의 부담을 분담할 때, 무급 돌봄자들은 사회적 고립과 심리적 소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치매 환자의 고립감 해소, 가족 돌봄자의 심리적 부담 감소, 지역사회 응급 대응 비용 절감 등은 사회적 투자 대비 효과(Social Return on Investment, SROI) 측면에서도 실질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됐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한 인식 개선을 넘어, 지역사회가 제도·문화·서비스 전반을 바꾸는 계기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의 치매안심가맹점 역시 이 같은 국제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작은 가게에서 시작된 변화, 지역이 치매를 기억할 때

치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문제다. 지역사회에 치매안심가맹점 스티커가 붙은 약국, 골목 안 세탁소, 편의점, 미용실 등이 치매 친화 환경의 중요한 일부로 기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치매 환자와 가족에게는 큰 힘이 된다.

‘치매를 기억하고 배려하는 동네’는 초고령사회에 꼭 필요한 가치다. 매일 뜨는 실종 문자도, 동네 이웃들의 따뜻한 관심으로 줄일 수 있다. 치매안심가맹점은 지역사회가 치매를 공동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함께 대응하는 치매 친화 환경 조성의 실질적 거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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