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한 기록물
사후에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 활용
심리적 불안을 덜고 충실하게 살도록 돕는 정리 노트
2011년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노트>가 개봉됐다. 가족을 주제로 한 영화를 많이 찍어 우리나라에 팬덤이 형성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제작을 맡았고, 이와이 슌지의 조감독 출신인 스나다 마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직접 촬영했다. 개봉 초기 2개 관에서 상영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흥행에 탄력이 붙자 상영관이 늘어나 다큐멘터리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20만 명이 관람했다. 영화는 일본 사회에 ‘엔딩노트 쓰기’ 열풍을 일으켰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줄거리는 회사 정년 퇴임을 한 뒤 위암 판정을 받은 스나다 도모아키(69세)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는 도쿄올림픽이 열린 1964년 도쿄에 본사를 둔 회사에 입사해 43년을 근무하며 성실하게 살았다. 67세에 은퇴한 후 여유로운 생활에 들어서자마자 말기 암 판정을 받는다. 예상치 못한 시한부 선고 앞에서 슬퍼하기보다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엔딩노트’를 작성한다.
그는 엔딩노트에 ‘평생 믿지 않던 신을 믿어보기’, ‘평생 찍지 않던 정당에 표 한 번 주기’, ‘일만 하느라 소홀한 가족들과 여행 가기’, ‘장례식 초청자 명단 작성’, ‘아내에게 사랑한다 말하기’ 등 11가지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가족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는다.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그의 인생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영화의 감독과 편집, 촬영을 모두 막내딸이 맡았다. ‘엔딩노트’가 채워질수록 가족들과 이별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죽음에 거의 이르러 의식이 가물가물한 시기에 손녀들이 오자 기적적으로 의식을 찾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가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준 장면이다.
일본은 죽음 전후를 준비하며 인생을 마무리하는 활동을 ‘종활’이라 부른다. 종활의 하나로 엔딩노트를 적는 사람이 많다. 야후재팬에 엔딩노트(エンディングノート)를 검색하면 2,591건의 상품이 뜰 만큼 다양한 엔딩노트 관련 제품이 판매 중이다. 자신의 정보와 재산 상황, 가족에 대한 생각, 여생에 하고 싶은 것 등을 노트에 적는데, 유언서보다 부담 없이 작성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엔딩노트와 유언서의 차이는 법적 효력이 있는지에 있다. 유언서는 법적 효력을 지니며 형식이 확실히 정해져 있다. 따라서 형식에 어긋나는 유언서는 무효다. 엔딩노트는 법적 효력이 없고 자신의 재산 분할 등에 대해 강제할 수는 없지만, 종활의 중요한 요소로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기 뜻을 가족과 공유하는 역할을 한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남겨두는 것이 매력이다. 또 유언서의 작성에는 높은 비용이 들지만 엔딩노트는 부담이 없다.
자신에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를 대비해 다양한 정보를 정리해 두는 노트이므로, 일반적으로는 사후에 가족이 곤란하지 않도록 재산이나 계좌에 관한 금융기관 정보, 장례 등에 관한 희망 등을 적는다.
엔딩노트의 이점
쓰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엔딩노트가 있지만 주요 이점은 크게 두 가지다.
자신의 사후에 가족의 부담을 완화
안심하고 남은 인생을 보내기
금융기관 계좌나 생명보험의 담당자 연락처, 그 외의 재산 상황 등을 기재해 두면, 가족이 필요한 조치를 하기가 편하다. 예금 통장이나 보험 증권 등을 찾는 수고를 없애고, 원활하게 사후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
가족이라도 세세한 것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 연락하면 좋을까”, “장례의 형식과 묫자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등 생전의 정보와 바라는 바를 모르면, 유가족은 고민에 빠진다. 중요한 연락처, 장례식에 관한 희망, 준비 사항 등이 적힌 엔딩노트는 남은 가족에게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자신이 신경 쓰는 다양한 바를 가족에게 전하는 것으로 심리적 평안을 얻는 효과가 있다. 엔딩노트를 쓰면서 재산 상황을 확인할 수 있고, 지금까지 인생에서 남긴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적어 보는 것은 심리적 안정에 도움이 된다. 가족과 친한 사람에 대한 감사 표현을 적어 보고, 남은 삶을 계획적이고 충실한 시간으로 보내게 하는 엔딩노트는 그 효과가 커서 일본은 여러 출판사가 다양한 종류를 출간하고 있다.
엔딩노트의 목차를 보면 ▲개인사 ▲개인 정보 ▲가족 정보 ▲의료 정보 ▲보험 정보 ▲재산 정보▲간호 희망 ▲장례 희망 사항 ▲유품 정리 ▲디지털 정보 ▲전하고 싶은 말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신 엔딩노트에는 기르는 애완동물 정보(건강, 중성화 유무)까지 남겨 요양시설에 들어간 뒤 유기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다음은 파이낸셜 플래너로 활동하는 츠즈키 에미코의 엔딩노트 팁이다.
엔딩노트에는 무엇을 쓰는가
엔딩노트에 쓰는 내용에 “이것을 써야 한다”, “쓰지 말아라”라는 결정이나 제한은 없다. 만약 무엇을 쓰면 좋은지 감을 잡을 수 없다면 일단 자신의 가족과 소중한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것과 자신이 남은 인생에 하고 싶은 것을 써 본다.
‘엔딩’을 ‘끝’이나 ‘종국’으로 파악해서 사후에 가족에게 보여주는 노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엔딩노트는 치매 등으로 자기 의사를 전하기 어려워졌을 때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경험한 바를 의식하면서 항목을 구성하는 것이 현명하다.
엔딩노트에 써 두면 좋은 내용으로 6개의 항목을 추천한다.
1. 평소 신경 쓰는 일상의 요인들
평상시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나 PC 계정, 애완동물 등 신경을 많이 쓰는 일이나 해약 절차 등에 대해 써 둔다. 특히 스마트폰이나 PC에는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저장되어 있으니 사용하지 않게 되면 안이하게 처분되지 않도록 정보 삭제나 해약·해제 등의 절차를 밟도록 자료를 남긴다.
아래와 같은 정보를 기재해 두도록 한다.
*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로그인 정보
* 등록하고 있는 웹사이트의 ID·비밀번호
* SNS 계정 ID 및 비밀번호
* 온라인 계좌(금융기관명)
* 전자 화폐 앱
* 음악, 동영상, 전자책 등 유료 서비스
* 사진, 동영상, 주소록의 저장 데이터 등
2. 상황 발생 시 연락처
위급 상황이 발생했을 때 연락할 수 있는 지인 연락처나 연락의 방법(전화 번호·이메일·커뮤니케이션 앱 등)을 기재해 놓는다.
* 친구·지인
* 참가하고 있는 협회나 단체 등
* 직장이나 비즈니스 파트너 등
* 계좌나 계약이 있는 금융기관 등
3. 의료 및 돌봄의 희망사항
중병으로 의사 표현이 어려운 상황을 대비해 완화 치료나 연명 처치를 하고 싶은지, 돌봄은 집이나 시설의 어느쪽을 희망하는 지 등 의료와 돌봄에 대한 희망을 써둔다. 가입하고 있는 보험사들의 정보(보험회사, 상품명, 보험 증권을 두는 장소 등)도 남겨둔다.
4. 장례식·산소에 대해서
장례식의 형식이나 규모, 부르고 싶은 사람 등을 쓴다. 또한 경조 회사의 회원제도(적립금 등)를 이용하고 있는 경우 해당 정보도 기재해 두면 안심이 된다. 산소에 대한 희망이나 정보도 적어두면 가족이 헤매지 않아도 되므로 불안이 경감된다.
5. 재산 상황
소유하고 있는 재산의 일람을 기재해 두면, 유산 분할이나 상속세 신고 처리에 도움이 된다. 덧붙여 차입금이나 신용 카드, 전자 화폐에 관한 정보도 기재해 둔다.
* 예금 및 증권 계좌(금융기관명)
* 보험계약(보험회사 명)
* 부동산(소재지)
* 자동차
* 귀금속
* 대출 및 신용 카드 등
6. 후견인 정보
후견인이 있으면 이에 대한 정보도 기재해 둔다.
엔딩노트의 주의점
엔딩노트 작성에 주의할 점으로 다음 세 가지를 유념해야 한다.
1. 법적 효력 없음
앞서 언급했듯이, 상속과 재산 처분에 대한 희망 사항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엔딩노트는 유언서와 같은 법적 효력이 없다. 어디까지나 기록한 사람의 희망만 참고되기 때문에, 「○○(특정의 재산)을 △△(특정의 사람)에게 계승해 주었으면 한다」라고 하는 내용을 기재해도 실제로 상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 재산 내용에 따라서는 지명된 사람이 곤혹스럽거나, 다른 상속인의 불만이 모여 싸움의 불씨가 될 가능성도 있다. 엔딩노트에 기록된 부담스러운 내용 때문에 실제 상속의 분쟁으로 작용하면 곤란하므로 엔딩노트가 유언서의 역할을 커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엔딩노트와 유언서는 작성 요건에 차이가 있다. 자유로운 형식의 엔딩노트와 달리 유언서는 유언의 내용, 유언의 작성일자, 유언자의 날인 등이 필수 요건이다. 또한 유언서는 사망 시 효력이 발생한다. 엔딩노트의 경우 이러한 요구 사항이 없고, 확인 시기도 생존과 사후 등 열려 있다. 보관이나 열람의 장소, 열람 방법도 자유롭다. 법적 효력이 없으므로 유언서를 대체하지 못한다. 법적 효력을 요구하는 경우는 엔딩노트가 아닌 유언서로 해야 한다.
2. 보관 장소 주의
엔딩노트에는 패스워드나 인감, 통장의 보관 장소 등 생존 중에 제삼자에게 알려져서는 안 되는 정보를 정리해 기재할 수 있다. 제삼자가 훔쳐 보고 도난이나 사기 피해를 당할 위험이 없도록 정보 유출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엔딩노트의 보관 장소나 보관 방법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3. 엔딩노트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
엄중하게 보관하는 것은 중요하다. 가족에게 엔딩노트의 존재를 미리 알려두어야 한다. 엔딩노트의 의의는, 자신의 병이나 사망 등에 직면했을 때 가족이 당혹스러워하지 않도록 부담과 불안을 경감시키고, 자신의 희망이나 가족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뜻을 가지고 작성해 두었는데, 전하고 싶은 상대가 엔딩노트의 존재를 모르고 있고, 결과적으로 전하고 싶은 정보나 마음이 사장된다면 의미가 없다.
엔딩노트를 적는 세대는 1947~1949년 사이에 출생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종활 산업의 규모는 2022년 기준 연간 5조 엔(약 5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엔딩노트는 2019년 2월 말 기준 135만 부를 돌파했다. 구매층은 20~50대 35%, 60대 28.7%, 70~80대 32.4%로 종활의 의식이 높은 고령자의 구매가 대부분이지만, 젊은 세대의 구매도 적지 않다.
웰다잉 문화가 확산하는 우리 사회에 일본의 이러한 엔딩노트 문화와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은 초고령사회로서 중요한 모델이 될 수 있다. 나이 들어 자기 인생을 정리하고 사후 절차를 예비하는 것은, 여생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꼭 필요할 뿐 아니라 심리적 불안감을 줄이고 남은 인생을 의미 있게 보내는 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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