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개월 시한부 이겨내며 샤이니 노년을 보낸 서무석 할머니
문화 수혜자에서 공급자로 살아간 할매래퍼의 스웩 넘치는 당당함
건강 수명은 세계 최상위이지만 노년의 행복지수는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일본은 89세의 현역 클럽 DJ 이와무로 스미코 할머니가 유명하다. 6월 2일 MBC 예능프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언빌리버블 스토리에 ‘밤만 되면 사라지는 스미코 할머니’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스미코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지 않는 방법으로 “지속하자! 활동”과 “기쁘게! 생활”을 신조로 삼고 있다. 매일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교 활동을 이어가며,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 치매 예방의 필수라고 한다.
스미코 할머니와 비견되는 할머니 힙합그룹이 우리나라에 있다. 경북 칠곡군은 할매래퍼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칠곡군은 ‘수니와칠공주’, ‘보람할매연극단’, ‘우리는청춘’, ‘어깨동무’에 이어 올해 3월 다섯 번째 할매래퍼 그룹 ‘텃밭왕언니’를 배출했다.
칠곡군 할매래퍼 그룹의 맏언니 격인 ‘수니와칠공주’는 지난해 8월 칠곡군 지천면에 사는 할머니들이 모여 결성한 평균 나이 85세의 래퍼 그룹이다. 올해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KBS1TV <인간극장>에 소개돼 화제가 된 바 있다.
‘수니와칠공주’ 그룹명은 리더 박점순(85) 할머니 이름의 마지막 글자인 ‘순’을 변형한 수니와 7명의 멤버를 의미한다. 아흔이 넘은 최고령자 정두이(92) 할머니로부터 여든을 바라보는 최연소 장옥금(75) 할머니 등 여덟 명으로 구성됐다.
할머니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에 태어나 6·25전쟁을 거치고, 보릿고개를 넘으며 대한민국 근현대 시대를 살아왔다. 늘그막에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은 래퍼로 변신했다. 전쟁의 아픔과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노년의 외로움을 경쾌한 리듬의 랩 가사에 담아 표현한다. 할머니들은 또 다른 칠곡 할매래퍼 그룹인 ‘보람할매연극단’과 랩 배틀을 펼쳐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수니와칠공주’를 든든히 응원하는 팬클럽도 결성되며 데뷔 4개월 차에 웬만한 케이팝(K-Pop) 그룹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다. 각종 행사는 물론 방송 촬영과 인터뷰 등 일정이 빼곡히 잡혔다. 할머니들의 맹활약이 전해지면서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 여러 신문·잡지사 인터뷰 요청 등 많은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다.
박점순 할머니는 “아침마다 놓치지 않고 보는 인간극장에 나온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며 “주름 많고 못생긴 할매들이지만 이쁘게 봐달라”고 당부했다.
지난 3월 26일 칠곡군은 왜관4리 도시재생커뮤니티 텃밭에서 김재욱 군수와 마을 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새로운 칠곡 할매래퍼 그룹 ‘텃밭왕언니 창단식’을 개최했다.
‘텃밭왕언니’는 ‘수니와칠공주’, ‘보람할매연극단’, ‘우리는청춘’, ‘어깨동무’에 이어 칠곡군에서 다섯 번째로 결성된 할매래퍼 그룹이다.
멤버는 주민을 위한 텃밭이 조성되면서 모인 동네 할머니들로 성추자(81) 할머니가 리더를 맡고 있고 최고령자 장영순(91) 할머니로부터 막내 이인영(78) 할머니까지 평균연령 86세의 8인조로 구성됐다.
‘텃밭왕언니’ 할머니들은 ‘수니와칠공주’가 지역사회를 넘어 전국을 무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모습에 동기 부여가 돼 랩을 배우기 시작했다.
칠곡군은 도시재생뉴딜사업으로 지난해 11월 국내 최초로 할매힙합그룹 배틀 대회를 개최했고, 할머니들의 요구를 반영해 강사를 섭외하여 전문적인 랩을 배울 수 있게 지원했다. ‘텃밭왕언니’ 창단식에서 김재욱 칠곡군수는 할머니들에게 힙합그룹을 상징하는 모자 스냅백을 씌워드리며 격려했다.
‘수니와칠공주’는 후배 그룹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찬 랩으로 축하 공연을 펼쳤다.
‘수니와칠공주’의 활동을 이어받은 ‘텃밭왕언니’ 할머니들은 창단식에서 랩 실력을 뽐냈고, 가족들은 꽃다발을 건네며 어머님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했다. 선배 힙합그룹인 ‘우리는청춘이다’와 ‘어깨동무’는 축전을 보내며 후배 그룹을 응원했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가 국내 방송사와 함께 열띤 취재 경쟁을 펼치기도 했다.
‘텃밭왕언니’ 리더 성추자 할머니는“TV를 통해 선배들의 랩 공연을 보았을 때는 우리도 쉽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랩을 해보니 힘들었다”며 “선배보다 더 잘하는 후배 그룹이 되도록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부을 것”이라며 각오를 밝혔다.
‘수니와칠공주’는 국내외 언론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연예인급 인기를 얻고 있으며 로이터 통신과 중국 CCTV에 이어 일본 NHK에서도 취재 요청이 이어지며 세계 주요 외신들로부터 ‘K-할매 콘텐츠’라고 불리며 극찬을 받았다.
각종 행사 공연과 대기업 광고 촬영 요청까지 이어졌다. 광고 출연료를 십시일반 모은 ‘수니와칠공주’는 리더 박점순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 모델도 하고 장학금도 낼 수 있어서 랩을 배우기를 정말 잘한 것 같다. 앞으로 할머니들과 함께 행복하게 랩을 때리면서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싶다”며 칠곡군의 손주뻘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쾌척했다.
할매레퍼에 감동을 받은 전 대우국민차 사장인 최은순 씨를 비롯해 익명을 요구하며 후원금을 전달한 편의점 사장까지 전국 각지에서 팬레터와 후원금이 답지했다. 할머니들은 재능기부로 부산 엑스포 유치와 평생 교육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도 앞장섰다.
또한 대한노인회와 함께 자신들이 만든 랩과 율동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며 치매 예방에도 힘을 보태기로 했다.
수니와칠공주 리더 박점순(85) 할머니는“랩을 배우니 여든이 넘은 인생 황혼기에 처음으로 황금기를 맞는 것 같다”며 “어렵고 힘든 시기에 우리들의 도전이 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김재욱 칠곡군수는 “수니와칠공주는 어르신들이 젊은 세대와 소통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문화의 수혜자에서 공급자로 거듭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며 “앞으로 칠곡할매문화관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칠곡군을 실버 문화 1번지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10월 13일 수니와칠공주 서무석(87) 할머니가 투병 중이던 혈액암 증세가 악화해 위중한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서 할머니는 최근 받은 정밀 검사 결과 암이 폐로 전이돼 의식이 혼미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월 목에 이상 증상을 느껴 대학병원에서 진단받은 결과 림프종 혈액암 3기와 시한부 3개월 판정을 받았다.
서 할머니는 암 투병 사실이 알려지면 그룹 활동과 랩 공연 등을 하지 못할 것 같아 가족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매주 화·목요일 마을 경로당에서 진행하는 연습에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각종 방송과 정부 정책 영상 제작 등에도 참여해 왔다.
가족들은 서 할머니 건강이 걱정돼 래퍼 활동을 만류했지만, 할머니가 공연 무대에 서면 어린아이처럼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시한부 3개월을 훌쩍 넘기며 활동을 이어간 서 할머니는 10월 4일에도 멤버들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2024 한글 주간 개막식’ 공연 무대에 올랐다.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은 12일 서 할머니에게 위문품을 보내며 “다시 만나 랩을 하기로 한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건강을 회복해 꼭 다시 만나 뵙길 기도한다”고 전했다.
15일 서 할머니는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칠곡군에 따르면 서 할머니가 이날 오전 대구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고 한다. 빈소는 지역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 말기암도 서 할머니의 ‘랩 열정’을 꺾지 못했다. 지난 4일 광화문광장의 무대가 서 할머니의 마지막 무대였다.
‘K-할매 콘텐츠’의 선두에 섰던 서 할머니는 나이와 상관없이 암 투병을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끝까지 선택했다. 행복하고 슬기로운 노년 생활을 궁리한다면, 서 할머니와 ‘수니와칠공주’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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