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노년생활] 치매 없는 노년, 스미코 할머니처럼
[슬기로운 노년생활] 치매 없는 노년, 스미코 할머니처럼
  • 황교진 기자
  • 승인 2024.06.03 1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세계 최고령 클럽 DJ 스미코 할머니의 마이웨이
낮에는 만둣가게 점주, 밤에는 클럽 DJ인 80대 할머니

화려한 조명, 심장을 뛰게 만드는 빠른 비트 음악, 젊은 열기로 가득한 곳은 나이 서른만 넘어도 들어가기 뻘쭘해진다. 청춘의 분출구인 클럽에는 TV 스타처럼 빛나는 DJ들이 있다. 나이가 조금만 들어 보여도 입구 컷을 당하는 이런 클럽 안에 89세 할머니가 멋진 선글라스를 쓴 화려한 패션으로 디제잉하고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손주들보다 어린 또래들에게 열광을 받으며 클럽 공간을 자신만의 비트로 쪼개며 직진하는 이와무로 스미코 할머니(岩室純子). 팬들에게 그녀는 ‘리듬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6월 2일 MBC 예능프로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언빌리버블 스토리에 ‘밤만 되면 사라지는 스미코 할머니’란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현역 세계 최고령 프로 클럽 DJ’로 기네스북에 오른 스미코 할머니는 작년 9월 9일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가부키초(歌舞伎町)의 한 클럽에서 ‘프로 DJ 데뷔 10주년 기념 무대’를 가졌다. 이 행사에 100명 가까운 팬이 몰렸다. 스미코 할머니가 DJ 박스에서 활동하는 이름은 ‘DJ 스미록(Sumirock)’이다. 낮에는 부모님 대부터 이어온 가업인 만둣집 ‘무로’를 동생 가족과 경영하고, 한 달에 한두 번은 ‘무로’의 영업시간이 끝난 후 유명 클럽에서 공연한다.

일본은 건강 수명은 세계 최상위지만 행복도는 54위(2024 세계 행복 보고서)로 저조하다. 자연재해는 있어도 분쟁이나 전쟁이 없고 의료 체계도 잘 정비된 편이다. 그러나 일본 국민은 행복을 실감하기 어렵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살아온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고령자는 ‘인생의 벽’을 넘기 어려워한다. 이런 토양에서 1935년생 이와무로 스미코의 반전 인생은 단순한 화제 이상이다.

스미코 씨가 디제잉을 시작할 때 나이가 77세였다. 평소에는 도쿄 신주쿠의 다카다노바바역 부근의 만둣가게 무로의 점주로 일하다 클럽 DJ로 이중생활을 병행했다. 두 개의 얼굴을 지닌 스미코 할머니는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지니고 있다. 일본의 여성 이직 사이트 <Woman-type>과의 인터뷰에서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길로 돌진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산다고 밝혔다. 80대 여성이 자신의 새로운 재능을 발견 후 자기 신념대로 직진하며 산다고 고백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관객을 휘어잡는 디제잉을 펼치는 DJ 스미록(Sumirock) /
관객을 휘어잡는 디제잉을 펼치는 DJ 스미록(Sumirock) / dj.sumirock 인스타그램

스미코 씨가 태어난 해는 1935년이다. 소녀 시기에 태평양전쟁을 경험했다. 가업인 만둣가게 ‘무로’는 올해 창업 70주년이다. 2012년인 77세에 고지마치의 DJ 스쿨에 다니기 시작해 2013년 9월에 클럽에서 직업 DJ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열렬한 사랑을 받는 최고령 DJ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해내는 게 저의 건강 비결입니다.” DJ 데뷔 10주년 기념 무대를 마친 뒤 스미코 씨가 한 말이다. “데뷔 10주년을 축하해 주려고 캐나다와 미국에서 손님이 와줘서 너무 기뻤습니다”라며 “많은 사람으로부터 축하의 박수를 받아 정말로 행복했어요”라고 덧붙였다. 화려한 의상과 선글라스 등으로 치장하고 DJ 박스에 서서 손님들에게 신나는 음악을 들려주면서 자신도 신나게 춤을 추는 활동 덕분에 건강하게 산다고 말했다.

스미코 씨는 자기 인생에서 ‘음악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전시 중에는 서양 음악을 듣는 것 외에는 다른 활동이 없었고, 아버지가 음악의 길에서 매우 고생했기에 자신과 아이들은 음악가로 살지 않겠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부 수업을 하고 빨리 결혼하는 것이 제일이라는 식으로 키워졌다.

전쟁이 끝나고 10대 후반이 되면서는 커리어우먼이 되려고 영어 회화 공부를 했고 무역 회사에 취직했지만, 아버지가 만둣가게를 시작한 후 일손을 돕기 위해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가게를 도왔다. 남편이 사망한 뒤 60대의 스미코 씨는 본격적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는 클럽 DJ로 데뷔한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지금은 클럽의 이벤트 무대에 서서 공연하지만, 스미코 씨는 어렸을 때 클럽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회사 일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만둣가게 일을 시작하면서 낮 1시에 오픈 준비를 시작해 새벽 1시까지 가게에 서 있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밤에 놀이 시간을 갖는다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60세가 되기 얼마 전에 남편이 사망하면서 운전 면허를 따고 나 혼자 여행으로 뉴욕을 다녀왔다.

 

"집에서 연습하는 것보다 많은 관객들이 춤추고 있는 가운데 곡을 선택할 수 있는 게 더 재미있어요." /
"집에서 연습하는 것보다 많은 관객이 춤추는 가운데 곡을 선택하는 게 더 재미있어요." / dj.sumirock 인스타그램

DJ를 접하게 된 것은 워킹 홀리데이로 일본에 온 프랑스인 이벤트 기획자 아드리안을 만나면서부터다. DJ 이벤트를 주최한 그는 스미코 집에서 하숙했다. 행사장에 스미코를 초대한 아드리안은 “스미코도 해 보지 않겠어?”라고 턴테이블을 만져보게 했는데 그때 흥미를 느낀 그녀는 본격적으로 디제잉을 공부하려고 DJ 스쿨 <IDPS>에 등록했다. 2012년 나이 77세였다. 그리고 디제잉 공부를 한 지 1년 만에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처음에 DJ 박스에 들어갔을 때는 너무 긴장해 음악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지금은 손님들 반응을 보면서 음악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어요.” 스미코가 이벤트 무대에 서는 것은 월 1~2회였다. 저녁부터 밤까지 가게에서 일하며 클럽 무대에 서는 것을 이어갔다. 일본 내 행사 중심으로 공연하다가 심지어 파리와 노르망디 행사에 나선 적도 있다.

“만두를 요리하는 나와 턴테이블을 돌리는 나, 어느 쪽이 진짜 저답냐고 묻는다면, 양쪽 모두 나입니다. 만두를 요리할 때는 손님이 맛있다고 말해주면 기쁘고, DJ 부스에 있을 때는 모두가 즐겁게 춤추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쁩니다. 나에게는 둘 다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스미코 씨는 종종 어떻게 그렇게 건강한지 질문을 받는다. 자신은 근사한 건강 비결이 따로 있지 않고 계속 일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여가 시간은 서투른 것입니다. 오히려 바쁜 게 좋아요. 이 나이가 되어도 아직 하고 싶은 것이 가득해요.” 스미코의 버킷리스트는 뉴욕의 작은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 그리고 스페인 섬 이비사, 프랑스 섬 코르시카, 이탈리아 섬 시칠리아로 여행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한다고.

스미코 씨는 코로나19 팬데믹 때 DJ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2021년 1월 건강에 이상이 생겨 1개월 정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이중생활을 청산하고 DJ 활동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요즘은 매월 한 차례 클럽 DJ 박스에 들어간다.

스미코 씨에게는 또 다른 목표가 있다. 영어 문서를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이다. 그는 “번역서를 내겠다는 것은 아니고 영어로 된 글을 일본어로 직접 번역해 주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요”라며 “이런 활동이 나의 머리를 건강하게 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인생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에는 너무 짧아요. 그러니까 뭔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나이는 신경 쓰지 않고 해 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위반하거나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면, 하면 안 되는 이유가 없어요. 나는 내 인생을 즐기고 싶습니다.”

 

dj.sumirock 인스타그램

치매에 걸리지 않는 방법으로 “지속하자! 활동”과 “기쁘게! 생활”이 있다. 매일 산책을 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교 활동을 이어가며, 기쁘고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 치매 예방의 필수라고 한다. 스미코 할머니는 “지속하자! 활동”과 “기쁘게! 생활”을 넘어서 있다. 손을 많이 쓰는 직업군인 지휘자나 피아노 연주자가 치매에 덜 걸리는 직종이라고 하니, 디제잉을 하는 스미코 할머니는 치매로부터 철벽을 쌓은 건강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셈이다. 스미코 할머니는 “DJ를 은퇴하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죽을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면 DJ 부스입니다”라고까지 말했다.

2010년 청춘페스티벌에서 가수 요조는 “내일 잘 살려고 오늘 먹고 싶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참지 말자. 우리가 그렇게 산다면 어떤 초등학생이 라디오 방송에 문자를 보내 ‘저는 뭘 해서 먹고살죠’라고 묻는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연했다. 스미코 할머니는 오늘을 즐겁게 사는 청춘의 모습이다. 사회와 고립되면서 치매 유병률이 높아지는 초고령시대에 치매를 예방하는 비결은, 내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하고 꿈을 향해 살아가는 모습에 있다. 80대 클럽 DJ 스미코처럼 늦은 건 없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