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보통의 하루'에 만족하는 삶
대한민국에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이 있다. 아나운서 100년사를 준비하는 연구모임도 있다. 한국아나운서클럽은 선후배 아나운서들의 친목과 권익향상을 도모하고자 분기별로 자발적인 모임을 한다. 난 이 모임의 막내 격이다. 60대는 신선한 1학년생이라고나 할까. 어느새 사회의 시니어가 된 마당에 프레시맨(Freshman)이라니, 감사할 따름이다.
선배님들이 말씀하시는 모토 중에 재미있기도 하고 조금 우습기도 한 문장이 있다.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다”. 무슨 해병대 조직도 아니고 고려대 동창회도 아니고 호남 향우회도 아닌데…. 그래도 왠지 이 문장이 싫지 않다. 국민의 사랑을 받은 아나운서로서 방송사를 떠나 그 어디에 있어도 아나운서로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지키고 품격 있게 살라는 뜻일 것이다.
평생 같은 일을 한 선후배들은 친소 여부를 떠나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편안하다. 1991년 SBS 공채 1기 TV 경력 여자 아나운서로 입사해 앵커, 스포츠캐스터, MC, DJ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지만, 지금까지 기억나는 사람은 SBS 라디오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27년간 진행하면서 시니어들의 걱정스러운 현실을 개탄하고 용기 있게 새로운 노인 문화를 만들어가던 그 시절에 만난 분들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는데도 의미 있는 시니어교육과 문화행사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꼭 나타나니 참 반갑고 고맙기까지 하다.
최근 용산 전쟁기념관 도서관에 갔다. 에이징커뮤니케이션센터에서 기획한 출판기념회 사회를 볼 일이 있어 들렀는데 특이한 경험을 했다. 도서관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평화로운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전투기, 헬기, 탱크 등 한국전쟁 당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아버님이 미 해군으로 참전한 한 외국인 교수는 한국에 사는 동안 방문한 곳 중 이곳이 한국의 아름다운 도서관 중 단연 최고라고 극찬하며, 그 사진들을 찍어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한 참전 용사께 보여드렸더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전쟁의 상흔을 기록한 곳에서 이제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평화의 쉼터가 된 자리라 뭔가 울컥하는 것이 있었다.
이날 출판기념회는 하버드대학 최초의 한국인 학생 대표를 역임했고, 하버드 로스쿨에서 수학 후 한국인 최초로 월스트리트에서 활동한 변호사로서 겸손한 나눔 실천가로 사셨던 고(故) 김정원 박사의 책 《그토록 이루고 싶은 꿈》을 묵상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분의 지인과 친구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한 사람의 일대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책을 같이 읽기도 하고, 고인이 된 친구의 20대 너무나도 가난하고 어렵던 그 시절을 엷은 미소를 띠고 나눈 이야기들이 참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노년의 행복은 뭘까? 추억할 것들이 많을수록 인생은 즐겁다고 한다. 인디언 속담에 친구란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라고 했다. 인생을 살면서 고단했던 날의 추억을 함께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행복
나태주
저녁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 있다는 것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힘들어도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멋진 사람보단 따뜻한 사람,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 ‘좋은 친구는 한 사람도 많다’는 시인의 고백처럼 내 곁에 누군가를 지켜주는 친구가 되자. 서러움과 노여움이 많아지는 청춘의 길목에 명랑한 유머로 만나는 친구들은 항상 옳다. 청춘의 꿈을 이루었든 여전히 미완의 인생이든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이 위대하든 소소하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를 남기며 기억되고 있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첫날, 하루를 기쁨으로 맞이하고 시간을 충만하게 보내며 저녁에는 감사기도를 잊지 말자. 이렇게 새해를 다짐해 본다. 소확행을 넘어 아보하(아주 보통의 하루)에 만족하자는 것이 트렌드가 된 2025년, 요란하지 않게 자박자박 다녀야겠다. “당신은 무엇을 남기고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시니어 레거시(Legacy) 프로그램의 화두가 아니더라도 하루하루를 차분히 기억되는 날들로 수놓아 가야겠다.
유영미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