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땀방울로 빚은 오늘, 그 은혜를 기억할 때
가을이다. 홍시가 익는 계절,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83.5세지만, 이제 우리는 100세 시대를 산다고 말한다.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라 해도, 정말 그럴까. 길어진 생이 행복으로만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골골 100세가 아닌 건강 100세’를 꿈꾸지만, 현실의 노년은 병과 외로움, 돌봄의 무게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야 한다.
경로의 달인 10월, 노인의 날을 기념해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행사가 성황리에 열렸다. 보건복지부 주최 행사에서 ‘당신의 땀방울이 모여, 우리의 역사가 됐습니다’를 슬로건을 내세우며, 100세 어르신 대표에게 청려장을 수여했다. 청려장은 장수 지팡이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70~80세가 되면 나라에서 만들어 주었다. 1년생 풀인 명아주의 줄기로 만들며, 가볍고 단단해 건강과 장수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해마다 이 특별한 지팡이인 청려장을 받는 어르신들이 늘어나는데 할머니들이 할아버지들보다 서너 배 많다.
2025년 서울에는 1925년생 100세 어르신이 364명이다. 이번 제29회 서울특별시 노인의 날 기념행사에서 사회자로 진행을 맡으며, 활기차고 건강하게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어르신들이 정말 멋있고 자랑스러웠다. 장충체육관에 모인 2,500여 명의 박수 속에 서울시장 명의의 장수기념패가 참석하신 두 분께 전달되었고, 진행자로서 나는 기념패에 적힌 “어르신의 100세 장수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이 있게 한 어르신의 헌신과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라는 문구를 큰 소리로 외쳤다.
4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버지는 때마다 일제 강점기의 처참함과 6.25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아느냐고 말씀하셨다. 당시 청년들은 꿈을 꿀 수도 없는 시대를 살았고, 그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통과 아픔을 먹고서 우리 세대는 무럭무럭 자라 공부했고, 각자의 일터에서 역량을 발휘하며 성장했다.
대한노인회 노인강령에는 ‘우리는 사회의 어른으로서 고귀한 경험과 민족의 얼을 후손에게 계승할 전수자의 사명을 자각한다’고 되어 있으며, 실천 사항에는 ‘존경받는 노인, 효친 경로와 전통적 가족제도, 젊은 세대에 봉사하며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는 노인’을 목표로 하고 있다.
요즘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전 세계 어디에 나가도 당당하다. 누구를 봐도 훤칠하고 똑똑하며, 부당한 것은 따질 줄 아는 용기와 개인의 권리의식이 분명하다. 다만 아쉬운 것은 부모 세대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국가와 지역기관에서는 제도와 복지로 풀어야 할 시스템을 구체화하고, 어르신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는 경로당 활성화와 지원 방안, 재가 임종제도의 논의 확산, 일자리 창출, 100세 건강프로그램의 확대, 문화예술 체험과 평생교육 등 채워나가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민간 차원에서는 섬김과 돌봄의 긍정적인 가치를 서로 나누길 바란다. 치매 어르신 가족 모임, 요양병원 가족 모임, 요양보호사 모임 등 돌봄 현장에서 만나게 되는 개개인의 정보와 소통은 서로에게 세밀한 선택의 방향을 제시하고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
조선 3대 시가의 한 사람으로 노계 박인로 선생의 「조홍시가(早紅詩歌)」가 떠오른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음직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노라.
시간이 지나면 더는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돌봄의 현실에서 허덕이는 가족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사치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미래의 어느 날 눈물 어린 후회가 남지 않도록 힘을 내시길 바란다. 사실 이 말은 나 자신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하다. 요양병원에서 가족 돌봄으로, 다시 요양원으로 돌봄의 해결책을 찾아 견디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 땅의 딸들, 아들들에게 손을 잡고 함께 의논하고 싶다. 부모를 대상으로 보면 답이 여러 개 나올 수 있다. 그 자리에 내가 있다면, 이기적으로라도 물어 볼 일이다.
왜 노인들이 살던 곳에 끝까지 머물고 싶어 하는지, 차가운 병실에서 임종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지, 공공의 이익을 앞세워 힘없고 약해져 가는 노년이 홀대받지 않는지…. 거리에서 만나는 노년의 모습이 그 나라의 경제와 문화 수준이다. 소녀가 할머니가 되고 소년이 할아버지가 된다.
어르신들의 피와 땀으로 이룬 대한민국! 부디 그 은혜를 잊지 않는 오늘이 되길 바란다. 노계 선생의 조홍감도 나훈아 선생의 홍시도 좋다. 지금 가까이 계신 내 부모 우리들의 부모에게 가져다드리자. 연로하신 우리 엄마의 환한 웃음이 잠시라도 가을하늘을 물들일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