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친구가 소중한 건 우리 모두 외롭기 때문
장미의 계절이다. 꽃의 여왕이라고 하는 장미, 사람마다 좋아하는 꽃들이 있지만 난 장미 중 평범한 들장미가 좋다. 이른 봄꽃의 정원을 지나 여름꽃 잔치가 시작되기 전 담장 너머 피어나는 분홍색과 빨간색의 장미는 가던 길을 멈추게 하고 복잡한 삶의 상념을 잊게 한다. 어린 시절 보았던 <들장미 소녀 캔디>라는 만화영화도 어렴풋하게 기억나고, 아무튼 장미가 주는 미소는 항상 향기롭다.
며칠 전 ‘아나운서클럽’의 선배님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갔는데, 그날따라 왠지 핑크색이 눈에 들어와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 불문 핑크레이디’ 치장을 하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인 데다 낭만 가객들이라 낮술도 오갈 것 같아 전철을 타고 이동했는데 아무래도 옷차림이 좀 튀었나 보다. 나와 비슷한 컬러의 옷을 입은 여성은 한 명도 없었다. 하늘은 푸르고 나뭇잎들은 초록으로 우거져 가는데, 이런 계절에 맞는 컬러가 시크한 올 블랙은 아닐 게다. 아니나 다를까, 길을 걷는데 한 신사분이 기분 좋은 말씀을 하며 지나가신다. “옷 색깔이 참 예뻐요.” 사심 없는 칭찬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모임이 즐거운 이유는 사람 때문이다. 실없는 농담에도 하하호호 네버엔딩 스토리가 이어지는 선후배의 만남, 한때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선배님들이다. 이젠 그 이름조차 잊히고 있지만 만나면 이야기의 중심은 대형 방송사고 냈던 에피소드와 추억 소환이다. 그리고 그 시절로 돌아간 선배님들은 다시 젊어진다. 젊게 사는 시니어들에겐 비결이 있다.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라는 것이다.
결혼기념일에 부부 모임으로 몇 명의 친구들이 모였다는 팔십 가까운 선배님은 정말 재미난 고백을 해서 모임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친구들과 식사 장소에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보았듯’이 평생 처음으로 이상형의 미인을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보기 아까워 같이 온 친구들에게 그 마음을 전했단다. 그랬더니 그 자리의 모든 노신사가 이구동성으로 그녀를 최고의 미인으로 인정하고 너무 늦었다며 한숨을 쉬었다고! 그런 얘기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주는 선배님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마음은 청춘이라고. 아직 감성이 살아있다는 것은 노화를 늦추는 자연의 비책이다. 선배님, 제발 철들지 마세요.
나이 들어도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죽이 맞는 친구’와의 만남이다. 죽을 쑨다는 건 여러 재료를 잘 어우러지게 끓여, 맛있는 한 그릇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죽이 맞는 친구 사이도 한 그릇의 맛난 죽처럼 서로 잘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는 관계를 의미한다. 그냥 만나면 별것 아닌데도 웃음이 나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노년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건강과 어느 정도의 돈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은 함께 놀아 줄 친구가 곁에 있느냐다. 한창 일할 때는 주변에 사람이 넘쳐서 오히려 사람 공해로 자연을 찾거나 혼자 자발적 독립생활을 하다가도, 은퇴하면 그 많던 인적자원이 하나둘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그 시기가 바로 노년이다. 하루 몇십 개씩 보던 문자나 카톡이 지겨워 조용히 탈퇴하던 지난날은 어느덧 사라지고 진짜 조용한 날들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친구도 너무 나이를 따지지 말고 위아래 10년은 지인으로 삼고 학벌, 재산, 교양, 취향에 맞는 코드 인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면 좋겠다. 와인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고 하지만 새 친구는 새로운 시각과 에너지를 선사해 생활에 활력과 즐거움을 준다. 오랜 친구는 귀하게 챙기고 새 친구는 즐겁게 만나면서, 깊은 우정과 설렘을 누리면 시야가 넓어지고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 인생 후반을 만들어 가면 어떨까?
남들은 독서클럽, 운동 모임, 동호회 만남으로 활동을 멈추지 않는데 나만 방콕하며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면 잠시 생각해 볼 일이다. 정기적으로 동네 행복복지센터 문화 강좌나 지역 도서관 프로그램, 공원 체조 모임, 종교 모임에 참여하면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다. 노년의 외로움은 우울증, 치매와 직결되니 일단 밖으로 나가는 습관을 갖도록 하자.
마음은 언제나 청춘이다. 올 하반기를 잘 보내려면 우선 다음 세 가지를 챙겨보자.
1.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해 주는 추억 소환 친구를 귀하게 여긴다.
2. 함께 웃고 긍정적으로 오늘을 사는 유쾌한 친구 모임에 나간다.
3. 코드 인사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고 새 친구를 만나 다양한 세상을 즐긴다.
내 곁을 지켜주는 한 사람의 친구가 소중한 것은 우리 모두 외롭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년의 우정은 더욱 빛난다.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