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고 다정하면 봄날은 더욱 무르익어 간다

길을 걷다 제비꽃을 밟을 뻔했다. 목련이 너무 아름다워 다가가다가 작은 제비꽃과 민들레를 미처 보지 못했다. 우리 선조들은 해마다 이맘때 피는 보라색 제비꽃을 오랑캐들이 쳐들어올 때 핀다고 오랑캐꽃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생각나 쓴웃음이 지어졌다.

인간이 100년을 산다는 것은 수많은 문화의 경험과 충돌을 몸소 겪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 세대는 매년 춘궁기가 힘겨웠지만, 이제 우리 세대는 그런 이야기를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뿐 봄을 즐긴다.

내가 어릴 때 동네에는 눈먼 할머니(아마 녹내장을 앓은 분이었을 거다)와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 모처럼 자식들이 와서 집이 떠나가도록 큰 소리로 “어머니” 불러도 듣지 못하시는 연로한 어르신이 많았다. 그것이 노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어서 사실 별반 신경 쓰지도 않았다.

 

사진: 유영미 
사진: 유영미 

 

나뭇가지를 흔드는 새들의 날갯짓과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는 봄날, 사실 젊을 때는 당연한 것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맛을 느낀다는 것이 참 경이롭고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를 뜻하는 ‘Retire’를 타이어를 다시 갈아 끼운다는 Re-tire로 재미난 해석을 붙이며 우리는 백세시대를 건강하고 활기차게 살려고 한다. 인생도 타이어도 적당한 때 보수를 해야 한다는 Re-tire!

주름도 별로 없고 피부도 뽀얗던 우리 엄마 박 권사님도 구순이 넘으면서 이젠 돌봄이 필요한 생활이 되고 말았다. 화장실에서 어지러워 한번 주저앉으시고 요양병원에서 3개월 동안 견디셨다. 요양병원에서 기저귀 신세를 지다 보니 간병인이 실수로 배변 패드를 버리면서 보청기까지 같이 버려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계속 누워 계시다 보니 밖으로 외출은 불가능하고 보청기까지 없다 보니 손짓발짓으로 대화해야 하는 답답한 생활이 지속됐다.

목소리는 커지고 대화는 안 되는 상태의 엄마는 매일 보청기 타령을 하셨다. 이동이 조금 가능해지자 제일 먼저 보청기를 새로 맞추러 나갔다. SBS에서 어르신을 위한 방송 <마음은 언제나 청춘>을 오래 한 나였지만 방송 정보와 현실은 차이가 컸다. 어르신들에게 지원되는 보청기 지원금을 타려면 현실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절차가 너무도 많다. 특히 이동도 어려운 형편에 지정 병원 예약과 방문 검사 절차는 이미 난공불락이다. 한 번 외출도 이렇게 어려운데…. 이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는 분들은 다행이겠지만 있어도 접근조차 힘든 까다롭고 피곤한 서류 절차들은 그냥 그림의 떡이다!

정부가 보청기 지원 사업의 홍보는 엄청나게 하는데 사실 이것저것 따져보고 알아보면 큰 도움이 되지 않고 힘만 든다. 수혜자로서는 간소한 절차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정부 지원 제도는 일단 수혜자가 맞는지 의심하며 숱한 복잡한 절차를 밟게 해 길게는 1년이나 시간을 허비하게 한다. 어르신들에게 6개월에서 1년은 젊은 세대의 세월과는 다른 개념이다.

우리 아버지는 보청기 지원 접수를 하고 절차와 검사를 기다리다가 결국 받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보청기 지원 순서가 왔을 때 얼마나 가슴 아프고 죄송했던지…. 아버지의 귀가 어두워졌을 때 정부의 보청기 지원 제도를 말한 것이 나였고 아버지는 방송국 다니는 딸이 하는 제안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하고 믿으셨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좀 더 살펴드리지 못해 새 보청기로 빨리 바꿔 드리지 못한 것이 내내 죄송하고 후회스럽고 가슴 아팠다. 아버지 장례를 치른 후 길을 가다가도 보청기 가게만 보였다. 보청기도 안경처럼 시력이 나빠지면 빨리 새로 맞추어야 한다. 이 어리석고 무심한 딸은 보청기를 한번 맞추면 그냥 내내 쓰는 줄 알았고 청력 회복은 불가능한 줄로만 알았다.

아버지와 병원을 갈 때도 의사의 지침을 필담으로 아버지께 전해드리는 것이 효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세상 이치에 밝고 늘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좋아하신 아버지에게 귀가 어둡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까 생각하니, 그때 좀 더 현명하고 빠르게 방법을 찾지 못한 내가 밉고 한심하기만 하다.

어쨌든 엄마를 모시고 보청기를 맞추러 가니 담당 실장님이 하는 말, “역시 딸이 있어야 해요”. ‘아! 이분은 나의 과거 실수를 모르시네'. 살짝 웃음이 나왔다. 주인은 “아들만 있는 어머니들은 불쌍해요. 아들들이 뭘 몰라” 한다.

보청기라는 것이 한번 맞추고 평생 그냥 두면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귀지가 있으면 청소해야 하고 보청기가 어르신 귀에 잘 맞는지 여러 가지 시도도 해야 하는데 아들들이 오면 무슨 큰 효도나 하는 것처럼 생색내고 자잘한 서비스를 받으러 재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딸들은 사흘이 멀다고 엄마가 주변 소음을 불편해하신다, TV 소리가 더 잘 들리게 해줄 수는 없는지, 사람들 많은 모임은 안 가시니 4인 정도 식탁 대화가 가능한 소리에 집중하게 해달라든지, 보청기 사이즈가 안 맞으니 줄여달라든지…. 정말 추가 주문이 많다는 것이다. 보청기 담당 실장님의 얘기를 들으며 요즘 시대는 선이 굵은 아들들보다 세세하고 시시콜콜한 딸들의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90대 할머니가 보청기를 새로 해 작은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게 되자 오히려 70대 보청기 안 한 아들이 어머니 소리를 못 알아듣는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들었다. 노안이 오면 인상을 쓰며 책을 볼 것이 아니라 패션 감각 있는 돋보기를 사고, 다리 힘이 약해지면 당당하게 지팡이를 짚고, 귀가 어두워지면 보청기 쓰는 것을 창피해할 일이 아니다. 어느 제품이 적당하고 합리적인 가격인지, 친구들과 정보를 주고받고 지원을 받을지 구매할지, 꼼꼼하게 따져보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스마트한 시니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노안이 온 모습을 보고, “선배, 정말 늙었구나. 돋보기 안 쓰면 안 되는 나이네” 하고 깔깔거리는 후배들이 아니라, 멋진 안경점을 소개하고, 염색 안 한 흰머리 살짝 날리는 시니어들을 더욱 아름답게 보는 시선이 모이면 좋겠다. 그리고 과묵하고 무뚝뚝한 아드님들은 연로하신 어머니께 좀 더 살살거리면 좋겠다. 다정하고 다정하면 봄날은 더욱 무르익어 가니까.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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