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활기차게 사는 방법

일을 오래 한 여성들은 대체로 시간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다. 무더운 여름, 카페에서 브런치와 아이스커피를 즐기며 3~4시간 수다 천국으로 이어지는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 왠지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아니,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로 저렇게 아까운 시간을 보낼까?', '카페 주인도 생각해야지. 혹시 두 사람당 커피나 음료 하나 마시는 건 아니겠지?' 괜히 그 사람들의 삶도 모르면서 판단하고 결정타를 날리고는 했다.

극단적인 무더위로 대부분의 만남을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보자고 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20대에 방송국 생활을 함께한 여자 아나운서의 모임 날짜가 변경 불가였다. 지방에 살면서 오랜만에 교육 사업을 접고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녀를 축하하고 앞날을 설계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미국 생활 후 두 자녀를 훌륭하게 키운 인생 선배로 무려 30여 년 만에 만났다.

대학로 맛집에서 점심을 든 우리는 부근의 카페를 찾았다. 유명 브랜드의 커피 전문점은 우리 스타일이 아니고 낭만적이고 다소 조용한 장소를 택했다. 매미가 무섭게 울고 뭉게구름은 파란 하늘 위에 떠가고 나무들을 더욱 초록 초록한데 우리들만 세월 속을 지나온 것 같았다. 눈 깜짝하니 30년이 그냥 흘렀다. 재잘재잘 깔깔깔 하하 호호 20대 후 갑자기 나이 든 후 만난 우리들의 수다는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끝날 줄 몰랐다.

언니들, 나 비밀인데 직장생활하면서 기념으로 모처럼 좋은 사파이어 반지를 하나 내게 선물한 적이 있어. 요즘 울트라마린 컬러에 빠져서 옷과 반지를 맞춤 컬러로 하고 나갔다가 귀가한 뒤 그 옷 그대로 청소하고 텃밭에 나가 밭일하고 쓰레기 버리고 화분에 물 주고 땀범벅이 되고 보니 글쎄 주머니에 넣어둔 반지가 없어진 거야. 놀래서 다시 밖에 나가보고 집안을 샅샅이 뒤지고 생난리를 쳤는데 결국 반지는 사라졌어. 너무 속상하고 남편에게 말도 못하고 내가 너무 한심해. 도대체 반지에 발이 달린 걸까? 주머니에서 어떻게 빠졌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나는 왜 외출복 상태로 그 일을 한 걸까? 나의 미련함과 후회가 속사포처럼 터져 나왔다. 나의 씁쓸한 고백에 그녀들이 맞장구를 쳤다. 난 반지를 벌써 세 개째 잃어버렸어. 아무도 몰라. 비밀이야. 당연하지. 반지나 목걸이 귀걸이는 이제 내 것이 아냐. 하고 나가면 다음 날 어디론가 사라져….

와! 웃픈 이야기다. 그 깔끔하고 예쁜 언니들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내겐 처음 있는 사건이라 충격이었고 이렇게 노인이 되는구나 심란했는데 이미 언니들은 인생 다반사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다니 놀랍기도 하고 작은 위로로 되었다. “영미야, 절대 남편에게 말하지 마. 괜히 고통을 줄 필요는 없잖니? 말하고 나면 아마 본전도 못 찾을걸….” 그렇구나, 부부 사이의 하얀 진실은 오히려 평화를 깰 수도 있구나. 씁쓸한 마음 반 지혜로운 처세 반 알 수 없는 세상살이다.

우리는 왜 기억 저장고에 탈이 나는 걸까? 생각해 보니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아끼던 양산도 들고 나갔다가 집에 오면 없어졌고, 핸드백의 립스틱은 하나로는 부족해 몇 개를 넣고 다녀도 늘 사라졌다. 그 중요한 성인병 예방약들은 잠깐 다른 일을 하다 보면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헷갈리며 단정했던 인생 품격이 엉망이 돼가니 이제 ‘난 절대 그런 일은 없어’라고 확신을 못 하겠다.

이젠 고인이 되셨지만 오래전 이어령 선생님 강연을 들었을 때 생각나는 에피소드가 있다. 선생께서도 자꾸 깜빡거리는 기억력 때문에 아침에 양치질을 몇 번씩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비법을 발견했는데 내가 아침 양치를 했나? 궁금하면 꼭 칫솔을 만져보고 젖어 있으면 했구나, 마른 상태면 내가 안 했나 하면서 양치질을 한다는 말씀이었다. 청중들과 같이 웃었지만, 그 석학께서도 나이로 인한 건망증은 알아서 온다는 말씀이었다.

여기서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운동이나 인지 건강에 좋은 음식을 굳이 전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한 정보들이 있다고 믿고, 다만 내 나름의 계획을 부끄럽지만 정리하고자 한다. 노년을 건강하게 활기차게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아비판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하게 사는 것은 위대한 현인의 일이다. 우리 일반인은 알아서 오는 건망증과 인사하며 자신을 자책하지 말고 너도 그랬고 나도 그렇다는 마음이 필수다. 비밀은 완전 공개는 불편하니, 속 이야기할 수 있는 몇 사람의 동지는 꼭 필요하다. 단 그 멤버끼리만 공개라는 비밀결사가 우선이다. 서로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친밀함을 배가시키는 즐거움이니까! 재발되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리고 나만의 루틴을 반드시 만들자. 반지는 항상 반지 함에 넣고, 핸드백에 작은 지갑 하나 더 준비해 반지나 귀걸이 보관용으로 쓰자. 제발 바지 주머니에 넣지 말고! 화장실 가서도 반지 귀하다고 손가락에서 빼지 말고 반지 낀 채 손을 씻자. 냉장고에 메모지를 부착해 매일 하는 양치, 아침 약 복용, 기본 약속을 체크하는 것도 추천한다.

덥지만 집안은 항상 정리 정돈을 잘해서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는 습관을 들이자. 남자들의 돋보기안경 찾기는 어느 집이나 매일 있는 일이고 이 일로 부부끼리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 귀찮아도 청소는 깨끗하게 하자. 하고 나면 복이 굴러온다. 그 발이 달려 도망갔던 내 바지 주머니의 사파이어 반지는 한 달 후 뒤뜰 데크 정리를 하다가 놀랍게도 빤짝이는 모습으로 소나무 그늘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어머나! 재발견의 감격. 눈물과 감사가 저절로 나왔다.

신중년 여성들의 카페 수다를 아름답고 즐겁게 바라보자. 집에서 혼자 있으면 우울증이 먼저 온다. 남편과도 24시간 같이 있으면 서로 기분 나쁜 소리가 오간다. 무조건 하루 서너 시간은 분리해서 자신의 시간을 갖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날 30년 지기 우리들은 한 카페에서 기록적인 5시간 폭풍 수다로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았고, 2시간마다 커피나 아이스크림, 음료를 추가 구매해 자릿값은 냈음을 밝힌다. 아르바이트하는 청년의 미소 띤 친절도 기분 좋았던 그 대학로 카페는 앞으로 우리들의 왕수다 아지트가 될 것 같다.

 

 

전 SBS 아나운서
서울사이버대학교 성악과 재학 중
현 사단법인 한국아나운서클럽 사무총장
SBS 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27년 진행
<SBS 뉴스와 생활경제> 최장기 앵커
《두 번째 청춘》(나이 들수록 더 행복하고 더 우아하게 사는 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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