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재택의료·완화의료 합동 심포지엄...대만 사례 공유
2022년부터 병원급 재택의료 도입...돌봄 철학의 전환 필요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익숙하고 편안한 내 집에서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지만, 현실은 여전히 병원 중심의 임종 환경에 머무르고 있다.
2023년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노인 가운데 53.9%가 ‘집에서 맞는 임종’을 원했지만, 실제로 자택에서 임종을 맞은 비율은 16.1%에 불과했다. 이들 중 72.9%는 병원 등 의료기관에서 생을 마쳤다.
노년기에도 살던 곳에서 계속 거주하는 ‘AIP(Aging in Place)’ 개념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지만, 가족의 돌봄 부담과 지역사회 내 의료·복지 연계 부족, 제도적 인프라 미비 등 복합적인 문제가 제기되면서 실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중증 질환으로 생애 말기에 접어든 환자와 그 가족들은 여전히 병원 중심 의료 서비스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재가 임종의 희망을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와 유사한 환경에서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 중인 대만에서 시행하고 있는 ‘병원급 재택의료(Hospital at Home, HaH)’ 모델이 새로운 해법으로 소개됐다.
서울대병원 완화의료임상윤리센터와 공공진료센터는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삶의 마지막을 함께 준비하는 돌봄 - 재택의료와 완화의료’ 합동 심포지엄을 열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초고령사회 진입과 더불어 주목받고 있는 생애 말기 돌봄의 문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고, 재가 임종이 실제로 가능하기 위한 의료·윤리적 조건과 실천 방안을 모색했다.
이날 기조 강연자로 나선 쭈웨이민(Wei-Min Chu) 타이중보훈병원(Taichung Veterans General Hospital, VGHTC) 가정의학과 교수는 ‘집에서 생을 마무리한다는 것 - 대만의 가정형 완화의료와 병원급 재택의료(Hospital at Home, HaH) 경험’을 주제로 발표했다.
쭈 교수는 “임종 돌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의미 있는 공간을 지켜주는 것”이라며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은 환자에게 신체적 편안함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과 자율성까지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최근에는 임종 장소가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면서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본다면 새로운 돌봄 방식을 통해 집으로 그 과정을 돌려놓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아일랜드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의 완화의료 체계를 갖춘 국가로 평가받는 대만은 국민건강보험(NHI)을 기반으로 4가지(▲입원형 ▲외래형 ▲재택형 ▲자문형) 형태의 서비스를 운영 중이다. 암 이외에도 루게릭병(ALS) 등 비암성 중증 질환까지 완화의료 보험 적용이 확대되면서 다양한 환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하지만 대만 역시 2000년대 들어 재가 임종의 비율이 감소하고, 병원 내 임종이 늘어나는 현상을 겪고 있다.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족이 구급차를 부르면서 ‘비계획적 병원 입원’이 잦아지고, 재택의료 수가가 낮은 데다 방문 횟수에 제한이 있는 등 구조적 제약도 따른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특히 전체 완화의료 환자 수는 증가하고 있지만, 자문형·입원형이 꾸준히 늘어나는 경향과 대조적으로 가정형 완화의료는 최근 성장세가 주춤해진 상황이다.
이에 따라 대만은 2022년 7월부터 병원급 재택의료 모델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이 모델은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재택 상태에서 높은 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설계됐다.
환자는 스마트 원격 모니터링 시스템으로 생체 신호가 실시간 확인되고, 초음파·ECG·X-ray 검사, 혈액검사 등 병원급 진료를 받게 된다. 환자가 원할 경우 완화의료팀이 수시로 방문하고, 24시간 긴급 대응 체계도 갖췄다.
쭈 교수는 “이 시스템을 통해 불필요한 입원을 평균 30% 이상 줄였고, 환자와 가족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애 말기를 준비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실제 사례로 소개된 말기 요로상피암 환자(82세, 女)는 2023년 고열과 구토, 저혈압 등 급성 증상이 있었으나 입원을 거부하고 집에서 치료받기를 원했다. 이에 의료진은 HaH 시스템을 활용해 즉시 항생제를 정맥 주사로 투여했고, 3일 만에 체온과 혈압이 회복되면서 환자 본인과 가족 모두 병원 이송 없이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또 다른 사례는 말기 간경변으로 3년간 25차례 응급실을 찾았던 69세 여성 환자였다. 그녀는 2019년 완화의료팀과 상담 후 집에서 편안한 돌봄을 받으며 가족과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쭈 교수는 “환자의 아들이 ‘이 상태로 집에 갈 수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 출발점이었다”며 “환자와 가족의 뜻을 실현하는 돌봄 계획이야말로 완화의료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그는 “죽음은 단지 의학적 사건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마무리하는 사회적 과정”이라며 “병원급 재택의료는 의료 서비스의 장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돌봄 철학의 전환”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환자가 집에 머문다는 것은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지킨다는 의미이며, 이는 의료체계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대만의 HaH 모델은 현재 ▲사전 돌봄 계획(Advance Care Planning, ACP) ▲감염 관리 ▲신속대응팀 ▲사물인터넷(IoT) 기반 생체정보 관리 등 다양한 기술과 제도가 융합된 형태로 발전하면서 이를 통해 환자의 의사결정을 실질적으로 존중하는 기반을 다지고 있다.
하지만 대만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쭈 교수는 “가정형 완화의료의 저조한 이용률, 낮은 수가 체계, 환자와 가족의 질환에 대한 이해 부족, 재가 임종에 대한 사회적 인식 한계 등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집’과 ‘돌봄’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며 “누군가가 집에서 임종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집’이 지닌 깊은 의미를 곱씹어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돌봄’은 단순한 의료 행위를 넘어 환자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귀 기울이고, 존엄을 지키며, 가족을 지지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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