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사라져도, 노래는 남는다”
치매에 대한 두려움에서 공감으로 바꾸는 문화 실험
감동을 넘어 돌봄과 존엄을 이야기하다
MBN이 11월 5일 첫 방송하는 〈언포게터블 듀엣〉(매주 수요일 밤 10시 20분)은 치매로 기억이 흐려진 이들이 가족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리얼리티 뮤직쇼다.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을 ‘치유의 노래’로 되돌리려는 시도이자, 음악이 지닌 정서적 회복력을 예능의 언어로 풀어냈다.
이 프로그램은 2024년 추석 특집 파일럿 방송으로 처음 선보였다. 당시 방송에는 배우 홍지민 모녀와 강애리자 모녀가 출연해 세대와 시간을 잇는 듀엣 무대로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파일럿 방송이 따뜻한 반응을 얻으면서, 올해 정규 8부작으로 편성했다.
파일럿 무대 위에서 노래 가사를 점차 기억해 내며 따라 부르는 어르신의 모습은 ‘음악이 기억을 깨우는 순간’을 보여줬다. 〈언포게터블 듀엣〉은 이러한 진정성 있는 연출로 ‘콘텐트아시아 어워즈 2025(ContentAsia Awards 2025)’에서 실버 프라이즈(Silver Prize)를 수상했다. 이 시상식은 아시아 전역에서 제작된 방송 프로그램을 대상으로 기획·연출·문화적 영향력을 평가하는 국제 콘텐츠 어워드로, 아시아 13개국 이상에서 150편 이상의 작품(최종 후보작 기준)이 후보에 올라 70명 이상의 전문가가 심사하는 권위 있는 행사다.
가족이 무대에 선다는 것...돌봄의 확장된 서사
〈언포게터블 듀엣〉의 무대는 ‘기억을 잃은 사람’과 ‘그를 기억하는 가족·친구·이웃’이 함께 선다. MC 장윤정은 제작발표회에서 “음악 프로그램이지만, 결국은 가족의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조혜련은 부모 돌봄 경험을 바탕으로 세대 간 공감을 이끌고, 오마이걸 효정은 젊은 세대의 시선으로 세대 간 연결을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손태진은 파일럿 게스트로 참여한 후 정규 출연진으로 합류해 ‘음악이 기억과 사랑을 잇는 다리’라는 취지에 공감했다고 밝혔다.
가족과 출연자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단지 감동의 장면이 아니라 돌봄의 관계가 예술로 승화되는 과정이다. 조혜련은 방송 중 ‘부모님을 더 잘 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돌봄의 본질을 되새겼다. 돌봄은 치료가 아니라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임을 보여준다.
〈언포게터블 듀엣〉이 감동적이면서도 치매 가족에게 호평을 받은 이유는, 존엄과 관계의 시선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을 기획·연출한 김진 PD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음악적 감동과 완성도를 평가받았다”며 제작 방향을 설명했다. 제작진은 가족이 참여하는 형식인 만큼 출연자 및 그 가족과의 충분한 협의 과정을 거쳤다고 밝혔다.
기억을 되살리는 목소리, ‘메모리 싱어’의 등장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이 프로그램만의 특별한 존재인 ‘메모리 싱어(Memory Singer)’다. 메모리 싱어는 출연자와 가족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해 온 노래의 원곡 가수, 혹은 그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기억의 대변자다.
무대 위에 그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잊혔던 가사와 표정이 되살아나고 노래는 단순한 선율을 넘어 기억의 문을 여는 자극이 된다. 정규 방송에는 인순이, 임창정, 윤민수, 박정현, 김태우, 소향, 박서진, 손태진 등이 메모리 싱어로 참여해 각자의 노래로 치매 환자와 가족의 추억을 되살린다.
김진 PD는 “가수들이 부모님을 대하듯 따뜻하게 무대를 꾸며 주었다”고 설명했다. 이 장면들은 음악이 기억과 사랑을 잇는 다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언포게터블 듀엣〉만의 인상적인 순간이다.
음악이 깨우는 기억, 과학이 뒷받침한 ‘기적의 순간’
〈언포게터블 듀엣〉의 핵심은 음악이 기억을 자극한다는 점이다. 치매 환자의 뇌는 손상되더라도 청각 피질과 감정 회로(편도체)는 비교적 보존되는 경우가 많다. 오래된 노래를 들으면 과거의 정서와 장면이 되살아나는 ‘음악 회상 반응(musical reminiscence)’이 일어날 수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있다. 스페인 출신 전직 발레리나 마르타 신타 곤살레스 살다냐(Marta Cinta González Saldaña)는 알츠하이머병을 앓으며 요양원에서 지내던 중 ‘백조의 호수’ 음악을 듣자 두 팔을 들어 무용 동작을 되살렸다. 젊은 시절 뉴욕 발레단 무대에 섰던 기억이 음악과 함께 깨어난 것이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 500만 회 이상 재생되며, 음악이 신체 기억(muscle memory)과 정서 기억(emotional memory)을 동시에 깨울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로 회자했다.
(영상 보기 클릭)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전직 발레리나, ‘백조의 호수’에 맞춰 춤을 추다(Former Ballerina With Alzheimer's Performs 'Swan Lake' Dance)
〈언포게터블 듀엣〉의 무대 역시 이러한 메커니즘을 응용하고 있다. 과거 함께 들었던 노래가 어르신의 기억을 자극하고, 가족이 함께 부르는 그 순간이 곧 관계 회복의 장(場)이 된다.
2023년 <Alzheimer’s Research & Therapy>에 실린 메타분석 연구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인지기능에 대한 음악 치료 효과”(Bleibel et al., The effect of music therapy on cognitive functions in patients with Alzheimer’s disease)에 따르면, 여러 무작위배정시험(RCT)을 종합해 음악치료를 받은 치매 환자가 대조군보다 인지 기능이 유의미하게 개선됐다고 보고했다. 연구진은 노래와 리듬 자극이 단순한 위로를 넘어, 두뇌의 회상·언어·정서 기능을 실제로 활성화한다고 설명했다. 이 연구는 음악이 인지 회복과 정서 안정에 실질적 효과를 줄 수 있음을 뒷받침한다.
즉, 〈언포게터블 듀엣〉의 ‘가족 듀엣 무대’는 감동 연출을 넘어 과학적으로 뒷받침된 참여형 인지 자극의 예능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치매 인식의 전환...“두려움에서 공감으로”
중앙치매센터와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25%, 환자 수는 약 97만 명(2025년 기준 추정)으로 나타났다. 2030년에는 12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제 치매는 한 개인의 질병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가 함께 감당해야 하는 일상이 되었다.
〈언포게터블 듀엣〉은 이 현실을 두려움이 아닌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무대에 선 출연자는 치매 환자가 아니라 존엄을 지닌 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파일럿에서 보여준 장면들은 ‘치매 친화 사회(dementia-friendly community)’가 지향하는 존중과 관계 중심의 접근(respect-based approach)을 문화적으로 실천한 사례로 평가된다.
치매를 병리의 언어에서 문화의 언어로 옮겨놓은 첫 예능
이 예능 프로그램은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을 카메라 앞에 세운 것이 아니라, 기억을 함께 나누는 인간으로 무대에 올린 용기 있는 시도였다. 다만 그 감동이 방송 안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돌봄 현장과 정책, 그리고 지역사회가 함께 응답해야 한다.
〈언포게터블 듀엣〉은 기억, 관계, 돌봄, 존엄의 재구성이다. 치매는 한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한 가족의 역사이며 그 역사에는 여전히 멜로디가 남아 있다. 이 프로그램이 보여주는 장면은 ‘기억의 상실’이 아니라 ‘기억의 공유’다. 무대 위에서 치매는 병의 이야기가 아닌,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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