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유쾌하게》의 저자 김혜령 이화여대 교수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을 사유하며 질문하는 고통의 해석학

신학자이며 윤리학자가 직접 겪는 치매 부친의 돌봄에는 어떤 사유가 담겨 있을까? 우리 가정에 오지 않았으면 하는 두려움의 질환인 치매가 어느 날 사랑하는 아빠에게 왔다.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무거운 현실에 직접 들어가기로 한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자신이 연구해 온 윤리학·신학·사회학의 프리즘에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은 아버지와의 동행기를 넣어 고통의 길에 모든 이를 위로하는 해석의 문장들을 담아냈다.

책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에는 치매 가족 당사자로서 현실 이해와 상황에 대한 철학적 사유, 사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따뜻한 공감의 언어와 성찰이 쓰여 있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우리의 심각한 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해결책 모색으로 읽힌다. 한파가 몰려온 날, 이화여대 ECC관 연구실에서 무거운 주제지만 따뜻한 이성과 감성의 대화로 풀어내는 김 교수의 말에는 책 제목처럼 유쾌함이 어려 있었다.

 

김혜령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 황교진 기자
김혜령 이화여자대학교 호크마교양대학 교수 / 황교진 기자

 

Q. 교수님 아버지는 언제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으셨고 현재는 어떤 상태인가요?

아버지 병을 가족이 알게 된 지는 5년이 됐어요. 이전에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하는 시그널이 있었는데 좀 미뤘어요. 20여 년 전 제가 유학 중에 아버지가 뇌경색으로 투병하셨는데 그때만 해도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은 모를 때고 아버지 연세도 50대 후반이니 치매 위험을 염려하진 않았죠. 빨리 발견돼 세브란스병원에서 집중 치료받고 회복하셨어요. 그 뇌경색이 현재의 알츠하이머병과 연결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해 방학에 아버지를 뵈러 귀국했는데 스텐트도 심은 상태였고 심장이 안 좋아서 목사 사역을 쉬고 안식년을 지내셨어요. 다행히 회복하시어 언어 능력이 거의 돌아왔죠. 다시 목회하시다가 67세에 은퇴 후 책을 쓰고 싶어 하며 여러 꿈이 있으셨는데 무료해진 일상에서 점점 안 좋아지셨어요.

다정한 분이었는데도 엄마와 갈등이 잦아져 제가 서예학원과 문화센터에 모시고 가서 아버지가 흥미를 가지실 만한 일들을 찾아봤어요. 당시 아버지는 뭔가에 꾸준한 관심을 두지 못하며 일상에 의욕과 적극성이 떨어져 보였는데 사실은 인지능력이 손상되기 시작한 거였어요. 목사로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지도자였다가 은퇴 후 무기력해진 환경이 문제였죠.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 치료를 받으며 인지 검사를 해보았는데 괜찮다는 결과가 나왔어요. 그래도 치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MRI를 한번 찍어보자고 해서 신경과 진료를 받으려 했는데 아버지가 거부하셔서 조기 진단 기회를 놓쳤어요.

 

Q. 일상생활에 문제는 없는 경도인지장애였을 수 있겠네요.

그렇죠. 그때 진단받고 초기에 쓸 수 있는 약을 드셨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인지기능 검사를 받는 게 심정적으로 어려웠어요. 지금은 디멘시아뉴스 같은 언론사의 역할로 달라지고 있지만, 대학교수인 저도 인지기능 평가를 받도록 권유해드리기가 죄송했어요. 그게 7~8년 전이었고요. 그러다가 금실 좋았던 엄마와 싸움이 잦아지면서 아버지의 인지기능이 떨어진 것이 원인임을 알게 됐죠. 결국 김포에 사시던 두 분을 서울의 우리 집으로 합가해 살기로 결정했어요. 부모님은 원치 않으셨지만 어렵게 설득했죠. 엄마가 특히 원하지 않으셨어요.

 

Q. 어머니가 원하지 않으신 이유는?

사실 엄마는 아버지 치매 진단 이후 자포자기하듯이 자식들에게 부담 주지 않고 자신이 모두 책임지겠다고 하셨어요. 지금도 아버지 케어의 가장 큰 비중을 맡고 계시지만 장기 돌봄을 위해서는 합가가 필요하다고 설득했어요. 그런데 부모님과의 합가*는 그렇게 간단치 않아요.

* 김 교수는 책에서 자신의 가정이 부모님과 ‘합가한 것’이지, 부모님을 ‘모시고 온 것’이 아니라고 썼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딸로서의 여성이 며느리로서의 여성에 비해 가사책임이 적은 생활 양태 등 헌신과 의무의 전통적 사고가 일으키는 차별적 문화에 사회적 대안을 탐구하는 자신에게는 ‘합가’가 적합한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과거에 우연히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놓으셔서 가족 요양으로 급여를 받으셨어요. 하루 종일 마주해 있는 아버지는 산책을 즐기셨는데 저희와 합친 동네가 아버지가 잘 아는 지역이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한강 주변과 영등포를 다녀오셨죠. 의사가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했지만, 산책만은 포기하지 않으셨어요. 뒤늦게 데이케어센터를 알게 됐고 그 프로그램을 받으면서 24시간 매여 있던 엄마도 여유를 얻을 수 있었죠.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표지 / 황교진 기자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표지 / 황교진 기자

 

Q. 치매 가족을 위한 돌봄 시설에 대한 정보는 좀 늦게 아신 편이군요.

네, 저는 데이케어센터가 요양원과 비슷한 곳인 줄 알았어요. 아버지보다 치매 증상이 심한 분들이 계신 줄 알았는데 훨씬 좋은 상태인 분도 다니시는 것을 알았고요. 초창기에는 데이케어센터에서 4시에 오시면 혼자서 꼭 산책을 다녀오셨어요. 그러다 아파트 다른 층 집의 도어락을 누르는 일이 발생하면서 혼자서는 못 나가게 되셨죠. 아버지 보행은 좋은 편이에요. 우리 남편과 강아지 두 마리 데리고 한적한 국회의사당 주변을 자주 걸었어요. 식사는 점차 자주 먹여드려야 했고, 단어를 많이 잊어버리셨는데 최근에는 단어 세 개를 붙여서 표현하세요. 6개월 전부터 기저귀 착용이 필수적일 만큼 대소변 실수 문제도 생겼고요.

 

Q. 어머님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두신 것은 아버지의 치매를 돌보려고 준비하신 건가요?

아니요. 엄마는 건강하고 활동적이에요. 노후에 뭔가 좋은 일을 해보려고 배우신 건데 마침 아빠가 치매 진단을 받아서 가족 요양보호사로 수행할 수 있게 된 거죠.

 

Q. 부모님과 합가를 결정한 과정이 궁금합니다.

저는 남동생이 하나 있고, 남편은 아들 넷에 막내인데 동생도 남편도 모두 목사예요. 처음부터 남동생이 돌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선은 남동생보다 제가 형편이 나았어요. 남동생은 자녀가 셋이고 작은 교회의 목회자였고, 저는 당시 중학생 딸 하나를 두었고 경제적으로 동생보다 나았어요.

제 책에도 썼지만, 페미니스트로서 못 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요. 부모님 두 분의 삶의 질이 안 좋다는 걸 심각하게 인지했고요. 남편도 동의해서 가장 안전한 케어는 우리 가정과 합가라고 결정했어요.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바나스는 똑같은 고통이어도 그 고통이 나를 호출하는 거라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했는데 제게 그렇게 다가왔죠.

 

Q. 교수님은 서문에 아버지 치매는 아버지 본인의 돌봄 부재에 기생하고 있었다는 표현을 쓰셨는데,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아버지가 자신도 좀 돌보며 사시지 하는 안타까움이 많진 않았는지요?

그런 안타까움이 초기에는 좀 있었지만 지금 병환 중인 분에겐 어떤 원망이나 아쉬움도 없어요. 얼마 전 치매를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을 봤는데 의사가 뇌에는 자신이 젊었을 때 좋아한 것들이 남아 있다고 하더군요. 아버지는 자신은 안 돌봤지만 열심히 사신 삶의 자취가 남아 있어요. 그중 하나가 걷기예요. 그리고 밥 먹고 휴지로 상을 깨끗이 닦고 신발 정리도 가지런히 하시고요. 평생 깔끔하게 살아온 흔적들이 아버지의 자기 돌봄의 방식인데,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성실하게 돌보며 살았어도 자신까지 돌보는 건 불가능했죠. 사실 지금 저도 저를 잘 못 돌보고 있는데요(웃음).

 

Q. 알츠하이머병은 길게는 20년간 뇌에 독성 단백질이 쌓이며 나타나는 증상이니 지금 멀쩡한 저와 교수님도 조용히 진행 중일 수 있는 병이기도 합니다. 아버지는 치매 유전자는 안 나오셨지만, 우울증이라든지 어떤 전조 증상이나 발병 위험이 큰 생활 습관 등은 없었는지요?

네, 아버지는 우울한 성향은 아니었고 오히려 굉장히 열정적이고 긍정적인 분이었어요. 그런데 당뇨가 좀 일찍 왔고 뇌경색이 결정적이었다고 보여요.

 

Q. ‘알츠하이머 모범생’이라고 표현한 아버님이 책을 쓰신 7~8개월간 치매 중증도가 높아지면서 새롭게 부딪친 고충은 어떤 게 있었나요?

엄마와 제가 잠시 집을 비운 상황에서 도어락을 열고 나가시려는 걸 말리는 사위에게 폭력을 행사한 상황이 있었고, 무기력증이 더 생긴다거나 식사를 덜 하거나 집을 나가신 뒤 실종된 일도 한 번 있어요.

우선 아버지가 사회생활을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데이케어센터는 아버지에게 새로운 사회생활 공간이에요. 처음 간 데이케어센터는 복지종합지원센터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규모가 크고 아버지 상태가 지금보다 좋을 때라 잘 맞았어요. 그러다 아버지 인지능력이 점차 떨어지니 프로그램에 거의 참여 못하고 혼자 배회하다 오셨어요. 젊은 직원과 마찰이 생기는 일도 발생했죠.

책에 제가 가부장제에 관한 얘기를 썼는데, 경험이 적은 젊은 요양보호사는 아버지와 같은 분을 어려워했어요. 물론 문제를 일으킨 아버지 잘못이 커요. 두 번 폭력적 행동이 나온 뒤 그 센터에서는 3진 아웃제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어요. 보호자로서 너무 미안했고 그곳에 계속 다닐 수 없어서 새로운 데이케어센터를 찾으려고 열 곳 넘게 전화를 돌렸어요. 옮겨야 하는 사유를 설명하니 오라고 하는 곳이 없었는데, 작은 규모의 민영 데이케어센터에서 받아 주어 등록할 수 있었어요. 시설 수준은 이전보다 떨어졌지만, 아버지와 맞는 부분이 있었어요. 집과의 거리에 상관없이 맡아주는 데만 있으면 감사한 상황이었죠.

 

Q. 여전히 환자의 증상에 따라 가려서 받는 데이케어센터들이 있고, 보호자는 조마조마한 약자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어 개선이 절실해 보입니다. 산책을 좋아하신 아버지가 남의 집 문에 들어가려고 하신 일이 잦아지면서 결국 아파트 이웃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치매 도어락’으로 현관문 잠금장치를 교체하셨는데요. 도시의 아파트 주택에서 아버지를 돌보며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GPS에 아파트의 다른 층에 계신 것도 알려주는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분명히 우리 집 라인에 뜨는데 몇 층에 계신지 모르니까 다른 집에 민폐를 끼친다는 게 큰 스트레스였어요. 다행히 우리 동네는 노인이 많은 편이고 이해해 주시는 분이 많아요. 합가하면서 한 달 정도 집을 고쳐야 했는데 같은 아파트의 전 라인 입주자에게 알츠하이머로 집을 고친다고 알리는 편지와 선물을 두 번 전달했어요.

제가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나눔과 환대를 가르치면서 치매인이 공동체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실천하는 것이 저의 전문 분야이기도 했고, 부끄러운 게 아니라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어려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몰라서 못 도와주는 부분이 있으니까,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제가 그렇게 하니까 엄마도 자신감이 생기셨죠. 치매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면 저희 라인의 이웃은 아버지의 병을 다 알아요.

 

Q. 디멘시아뉴스의 기획 기사로 사명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운영하는 요양시설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사회 인식은 요양원에 맡기는 건 불효이며 어르신을 버리는 것이란 데 머물러 있습니다. 아버지는 현재 집에서 데이케어센터에 다니시지만, 언젠가는 요양시설 입소도 고려하고 계시는지, 시설 입소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네,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어요. 가정에서 돌보는 제 기준은 엄마가 감당이 안 된다고 하실 때까지예요. 엄마는 시설 입소에 반대하세요. 자신이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돌보려 하시죠. 알츠하이머병이 심리적 갈등을 많이 안겨주지만 의학적 해결책이 생기고 도움받는 시스템도 나아질 거란 기대가 있어요. 단, 제가 중산층임을 전제로 한 거예요. 제가 중산층이 아니었으면 이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 이야기가 보편적일 수 없다는 사실이 솔직한 한계고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복지에 대한 언급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지만, 요양시설에 절대 입소하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건 반대입니다. 제가 책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데이케어센터나 요양시설은 아버지가 또 다른 사회로 진입하는 거라는 데 긍정적이고 열린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초등학교를 사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가 초등학교 진학을 기뻐해 주고, 동시에 좋은 선생님들이 가르치도록 교육 시스템을 국가가 관리하듯이, 돌봄 시설도 국가가 지원하고 노인을 위한 사회로 생각하도록 돌봄 인력 교육부터 처우 등 사회적 관심이 늘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당사자인 저부터 요양시설에 절대 보내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아버지도 때가 되면 또 다른 사회로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화도 산책 모습 / 김혜령 교수
아버지와 어머니의 강화도 산책 모습 / 김혜령 교수

 

Q. 배회하는 치매 어른의 원인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는 것이 바른 접근이라고 합니다. 교수님은 아버지의 배회 목적이 ‘가족 부양을 위한 근면성’ 때문이고 쓰셨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박사 논문으로 집을 소재로 거주 윤리에 대해 썼어요. 공부하기 전에 집은 각자 노력해서 사는 대상으로 여겼는데, 사실은 공적인 사회적 서포트로 개인의 집들이 존재하는 거였습니다.

돈이 많건 적건 국가가 길을 내줘야 자기 집의 가치가 올라가고 거기서 살 수 있듯이 노숙인에게도 돌아갈 집을 제공하는 게 사회 공동체적인 책임이라는 논문을 썼어요. 개인의 능력과 노력이 한계에 부딪힐 때는 공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죠.

윤리학에서 ‘집은 무엇인가’에 대해 지도 교수님이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Louis Pierre Bachelard, 1884~1962 프랑스의 철학자)를 연구하라고 하셔서 살펴보니, 집은 도구가 아니고 세계 안에서 돌아갈 구석이면서 다시 세계로 나가는 작은 공간이란 사유를 발견했어요. 그리고 노숙인들은 창살 없는 세계에 유배되었다는 표현도 접했고요.

 

Q. 치매 환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낯선 오지에 떨어진 존재로 표현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자기 안식처를 기반으로 죽을 때까지 왔다 갔다 하며 살아가는 거죠. 알츠하이머병을 만난 아버지께 “왜 그렇게 자꾸 나가시려고 해?” 하면서 밖에서 일하다 들어온 저는 안 나가고 싶잖아요. 바슐라르의 인식론에 의하면 아버지는 성실한 인간이기에 집을 나갔다가 집을 찾아 돌아오는 과정이 필요한 거였어요.

 

Q. 내가 일하러 나가야 한다면서 나가실 수도 있고, 여기가 우리 집이 아니니까 집으로 가야 한다며 나가실 수도 있겠어요.

네, 아버지가 집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어요. 엄마한테 계속 밤에 나가자고 졸랐는데 엄마가 짜증이 폭발해서 밤 10시에 잠옷 입은 채로 어딜 나가는지 보자 하시고 금세 돌아오실 줄 알았다가 사고가 났어요. 엄마가 아버지 뒤를 따라가시다 걸음이 빠른 아버지를 놓치고 말았어요. 엄마는 자기 걸음이 느린 것을 참작하지 못하신 거죠. 잠깐 놓쳤는데 평소의 산책길과 반대 방향으로 가셨어요. 저한테 미안하니까 바로 호출하지 못하셨고, 시야에서 놓친 뒤 10분이 지나 아버지는 사라지셨죠.

실종 신고를 한 뒤 남편과 남동생을 모두 불러서 새벽 내내 영등포역, 신길역, 한강대교 일대를 찾아다녔어요. 그 새벽에 제가 운전을 6시간 했거든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어요. 아버지 걱정도 컸지만, 혹여 남을 다치게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까지 들었어요. 새벽을 지나서 날이 밝아오는데도 못 찾았어요. 제 아이가 실종됐으면 아마 계속 찾아다녔을 텐데, 아버지니까 일단 집에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엄마께는 힘드니까 집에 가서 주무시라고 했는데, 혼자서 용산 쪽을 찾아다니셨다고 해요. 미안하셨던 거죠.

결국 남산에서 발견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아버지가 멀리 남산까지 걸어가신 거예요. 아침 운동하던 시민이 잠옷 차림의 아버지를 보고 신고해 주어 경찰서에서 집으로 모시고 왔어요. 경찰은 마지막 출몰 지역과 주변의 3개 구에 실종 문자를 보낸다고 해요. 실종 문자를 클릭하면 사진이 나와요. 치매 어르신 실종 문자가 오면 꼭 사진 확인 클릭까지 해주세요.

 

Q. 아리요시 사와코의 《황홀한 사람》에서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가 자신을 돌보는 며느리 이름만 기억하더군요. 아버님은 지금 가족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계세요?

엄마와 저만 좀 아시는 것 같아요. 아들은 가끔 못 알아볼 때가 있어요. 아버지는 자신보다 체격이 큰 남자를 무서워하는 편인데 사위인 남편이 체격이 큰 편이어서 함께 살며 안 하시는 행동이 생겼어요. 아버지가 엄마와 단둘이 사실 때는 신발을 늘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고 문단속을 심하게 하고 주무시며 가정의 유일한 보호자라고 생각하셨는데 남편과 함께 살면서 그런 행동이 없어졌어요. 체격이 큰 남자인 사위의 돌봄을 받는 처지로 인식하신 거죠.

 

Q. 집 밖에 나가려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인상적입니다. 책에 치매 환자와 나, 나와 우리 사회가 모두 연결돼 있다고 쓰셨는데 실제로 치매 환자를 돌보는 고통의 당사자는 연결보다는 단절적 고립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실에서 느끼는 그 단절감의 고통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제가 해석학이라고 쓴 이유이기도 한데, 해석학은 같은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해요. 치매를 퇴화의 관점으로 보면 절망의 언어가 가득하죠. 비교 관점에서 치매 환자에게도 어제보다 나은 일이 오늘 발생하거든요. 그런 관점의 생각을 많이 하려고 해요. 예를 들어 제 딸이 미술 입시를 준비하느라 아버지와 한 달간 떨어져 산 적이 있어요. 미술학원에 아침부터 밤까지 가야 해서 학원 부근에 숙소를 잡아서 둘이 지냈는데, 손녀의 존재를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아버지가 그 한 달의 끝 무렵에 “여자들 어디 갔어?” 그랬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전에는 그런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데 오늘은 할 줄 아시네, 하는 변화를 발견했고요.

무엇보다도 여러 증상이 있는 아버지가 데이케어센터라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하신 뒤로 가족한테 짜증 내는 일이 줄었고, 평생 살아오신 사회적 태도가 다시 나오기 시작했어요. 상대방을 존중한다거나 자기 외모를 신경 쓴다거나 하는 모습을 저는 긍정적으로 봤죠. 아버지가 사회적 존재로서 밖에 나가 다른 환자와 요양보호사들과 맺는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Q. ‘치매’ 용어가 인지저하증을 앓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비하를 재생산하기에 바꿔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국회에서 ‘치매관리법’ 개정안이 매번 발의만 되지 시행은 되고 있지 않습니다.

왜 안 바뀔까요? 치매에 대한 오해와 혐오가 여전히 횡행하죠. 자기는 절대 걸려서는 안 되는 병, 걸리고 싶지 않은 병으로 인식하는 동시에 치매 환자는 사회로부터 분리하고, 막상 가족이 걸리면 어쩔 수 없이 요양원에 보내면서 가족을 버리는 것으로 여기는 암묵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현재는 급하지 않은 거죠. 이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공동체적인 시급함이 아직 없기 때문이라고 봐요. 고통이 없는 게 아니라 무감각하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강산책로를 산책하는 김혜령 교수 부녀. 춥거나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한 아버지와 산책한다 / 김혜령 교수
한강산책로를 산책하는 김혜령 교수 부녀. 춥거나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할 수 있는 한 아버지와 산책한다 / 김혜령 교수

 

Q. 영화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가 한일합작 영화 <나비잠>에서 50대 베스트셀러 작가로 분했는데 극 중에 “나 알츠하이머래” 하며 스스럼없이 자신의 치매를 전달하는 대사가 인상 깊었어요. 치매를 만나도 그렇게 두려워하지 않고 오픈하는 인식 수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병을 공개하고 싶었어요. 창피한 게 아니니까요. 그러고 나서 엄마가 굉장히 밝아지셨어요. 치매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엄마에게 제가 이해하실 수 있는 언어를 드렸고, 엄마는 제 책을 요즘 두 번째 읽으며 딸을 자랑스러워하세요. 엄마는 그렇게 칭찬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저는 아빠의 다정한 칭찬을 받으며 자랐어요. 요즘 엄마가 아빠를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지셔서 제가 감사하죠.

 

Q. 보수 기독교에서는 교수님을 가족 정상성의 해체, 포스트모더니즘을 선동하는 페미니스트로 볼 수 있다는 부분이 의아합니다. 교수님은 치매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공동체적으로 품자는 얘기를 하는데 왜 보수 기독교인은 그렇게 볼까요?

우선은 제가 그냥 착한 딸로서 부모님을 모시겠다고 전달한 게 아니니까요. 결과적으로는 착한 딸로 보일 수 있지만 저는 여성과 남성이 하는 일이 다르지 않고, 여성의 삶의 주체는 여성이라는 생각으로 남동생에게 책임을 넘기지 않고 주돌봄자를 선택했어요. 전통적으로는 며느리나 딸이 맡던 역할이었죠. 어쨌거나 돌봄은 여자가 하는 일이라는 가부장적 사회 안에서 저는 기존의 성 역할로 돌봄을 획일화하는 것을 비판해 왔어요.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가정을 파괴하는 것으로 오독할 수 있고요. 페미니스트는 결혼을 안 하고 싶어 하고 자녀를 갖지 않으려 한다는 편견이 존재해요. 저는 내 가정을 새롭게 구성하고 싶은 목표가 있어요. 아들이 하지 않는 일을 딸이 어쩔 수 없이 도맡아 희생하는 ‘착함’과 ‘헌신’이 아니라 이제는 역할을 재조정해야 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제가 가장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와 어머니 일도 제가 많이 결정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에서는 낯선 모습이죠.

 

Q. ‘가장 미안한 사람들, 그러나 미안함의 이유를 다시 물어야 한다’는 챕터에서 “타인을 돌보기 위해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갇히지 않도록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그(주돌봄자)를 향한 미안함에 성실히 답하는 자세다”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숨 쉴 여유도 없이 독박 간병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죠. 특히 영케어러 문제가 심각하고요. 돌봄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 또한 다반사고요.

아버지를 돌보는 일을 엄마가 100% 하신다면, 그 70%는 제가, 남편은 40%, 남동생은 20% 가능해요. 그러니까 20% 정도 가능한 남동생에게 갑자기 하루 종일 아버지를 맡길 수는 없어요. 제가 남동생에게 요청하는 건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해서 아버지와 산책을 해주면 좋겠다, 예요. 도움이 되건 안 되건 시간을 정해놓고 자주 들여다봐야 10% 커버하던 가족이 15% 커버할 수 있고 20% 커버할 수 있죠.

엄마를 봤을 때 한 70~80% 교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일차 주돌봄자의 역할을 견딜 수 있더군요. 아버지와 안전하게 잘 지내기 위해서는 가족이 서로의 돌봄을 가늠하고 대신하면서 주돌봄자가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치매 환자는 죽음만을 남겨 둔 절망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존재로 돌봄을 받아야 하니까요.

 

Q. 뉴스에 나오는 간병 자살, 간병 살인 문제에 치매 가족이 종종 걸려 있습니다.

문제는 국가의 역할을 말해야 한다는 거예요. 개인에게만 무게를 지울 수는 없는 공적인 문제임에도 개인의 문제, 심리적 문제, 윤리적 문제로만 보는 데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회복지사가 아무리 기능적 기술적으로 신경 쓴다고 해도 더 적극적인 개입이 이뤄져야 하죠. 개입하고 들여다보는 역할이 더 많이 필요하고요.

엄마를 보면 환자의 기저귀를 대신 갈아줄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환자의 기저귀를 갈아주는 일을 하는 엄마 자신을 알아주기를 원해요. “오늘은 아빠가 대변을 잘 보셨어” 하는 엄마의 말을 제가 잘 들어드리면, 엄마도 자기 곁에서 함께해 주는 이가 있다고 느끼면서 더 힘을 내시는 거 같아요.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여행도 다니려고 해요. 이모와 같이 뮤지컬을 보고 오시도록 한다든지, 환자와 분리되는 시간을 드리는 것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역할이죠.

 

Q.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분들에게 감사하고 존중하는 사회적 태도가 필요하다는 부분을 읽으며, 그분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고 현실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세금 부담을 감수해야겠죠. 노노케어의 문제, 중국인 간병인의 최저시급과 돌봄의 열악한 퀄리티 문제 등 우리나라 돌봄 현장의 문제는 복잡합니다. 요양보호사가 방문요양을 할 때 세 가정을 수행해야 한 달 생활비가 나오고요. 보호자로서는 장기적인 지출이 예고돼 있는데 비용을 더 지불하기는 힘겹고, 결국 전 국민이 조세 부담을 감수해야만 개선할 수 있는 현실이죠.

그래서 자본주의 자체의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해요.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가 다름에도 분리할 수는 없거든요. 개인이 자신의 능력과 노력으로 독립과 자유를 성취할 수 있다는 판타지를 제공하는 게 자본주의 사회예요. 많은 실업자가 존재하는데 그 실업자를 완전히 고용하는 상태는 아니죠. 기본적으로 실업자와 구직 상태의 사람들 혹은 최저 시급자들이 있어야만 돌아가고, 상위 계층이 잉여 재산을 축적하는 사회, 물론 효율성을 높여서 발전은 하지만 하위 계층 사람들의 비극을 기본 전제로 하는 사회 시스템이 자본주의예요.

사회복지는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 영국에서 나왔잖아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자본주의의 비극을 나름대로 해결하려던 방식에서 사회복지가 발전해 왔고 탄탄한 복지를 갖춰가는 데는 조세 부담 감수와 사회보험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해요. 재벌인 치매 환자가 자신만을 위한 요양보호센터를 자기 저택 안에 만든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곳은 사람 간의 인격적 돌봄과 우정이 있는 사회라기보다 모든 것이 자본으로 지급되어 구비된 안락한 시설에 불과할 거예요.

사회 공동체의 협의와 우정으로 각자의 몫을 만든 시스템 안에서 각 개인에게 행복한 노후가 제공되죠.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이면서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딸에게 엄마는 치매를 받아들일 거라고 쓰면서, 약해지는 건 당연한 거야, 와상환자가 되어도 그냥 나 재미있게 밥 좀 줘, 유쾌한 할머니가 되는 게 엄마의 꿈이야, 라고 했지만, 그 침대 주변의 요양보호사 고용 등의 체계가 정의롭지 않다면 제 행복은 가상의 꿈으로만 있겠죠.

 

Q. 우리 사회가 치매에 대해 노화의 일반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공포와 무지로부터 인식을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생각에 치매 인식 개선의 방법이 있다면?

저는 사회과학자가 아니어서 치매 인식 개선을 위한 제도나 정책에 전문적 견해를 밝히기는 어려운데요. 신학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결국 인간은 약해진다는 데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서구 신학과 철학이 가진 존재론은 신이 모태예요. 모든 존재의 근원은 절대 불변이고 인간은 변화하기 때문에 열등하다고 보죠. 따라서 변화하는 것, 특히 나이 드는 것을 열등해지는 과정으로 인지하고 있고요. 여기서 벗어나 인간의 생리에 대해서 긍정적 시선으로 보도록 하는 것이 인식 개선의 근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애로 태어난 사람도 있지만 나이 들면서 우리는 모두 점점 약해지고 결국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존재가 되는데 ‘치매에 걸리면 안 되는데’ 하는 사회는 결국 그 환자에 대해 무시와 혐오, 멸시를 담고 있는 것이죠. 인간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자식과 가족에게 피해 주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폐를 끼치는 데 대해 미안해서이기도 하지만 주체적인 상실에 대한 공포이기도 해요.

종국에는 나도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고 기저귀를 착용하는 상태까지 인정하는 것을 인식 개선에 포함해야 해요. 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최종적인 단계는 비극이 아니고 삶이 죽음으로 완성되는 단계이며, 누구나 거쳐야 하는 단계죠. 그 단계가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제겐 큰 위로가 됐어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으면 의존 속에 돌봄을 받는 축복을 느낄 수 있고, 교수란 직업에 우쭐댈 수 있지만, 나도 같은 병에 걸릴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우쭐대지 않게 하죠.

 

Q. 딸에게 보내는 편지글로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리거든’이 인생의 고통에 대한 명쾌하고 탁월한 해석으로 읽혔습니다. 신앙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책임을 공유하는 데 초점이 있다는 표현이 특히 와닿았고요. 초고령사회에서 이미 치매 유병률은 상당히 높아졌고 이 고통에서 함께 벗어나는 데 필요한 공동체적 제언을 해주신다면?

사실은 치매 문제만을 놓고 쓴 책은 아니에요. 저는 학교에서 인성 교육을 담당하고 있어요. 많은 분이 개인적으로 덕성이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성품에 대해 한 번도 사회 정의와 분리해서 가르치지 않았어요. 사랑은 사회 정의에 기반한다 혹은 사회 정의의 한계에서 사랑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요. 그것이 저의 신학이고 철학이에요.

제가 겪는 아버지의 치매 문제를 해석하는 힘이기도 해요. 어떤 고통에도 보편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하는 상당한 문제들이 사회 시스템과 분리돼 있지 않다는 점, 치매의 발생은 그냥 병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 치매 환자가 살아가는 문제는 공동체가 함께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겪는 고통은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혹독하죠. 한 가족이 해결하는 데도 만만치 않습니다. 국가 제도 차원의 공동체 도움 없이는 감당하기 힘들어요. 부모의 질병으로 경제적으로 추락하고, 가난하게 태어나면 더욱 비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우리가 함께 목격하면서도 무감각하다면 굉장히 비극적인 사회예요.

나는 고통이 없고 행복하고 모든 풍요를 누리더라도 누군가의 비극을 목도하면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해야겠다는 그런 고통의 감수성이 우리 사회에 있어야만 사회 전체가 살 만한 사회, 인간다운 사회가 되죠. 결국 그런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 인간성 훼손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Q. 끝으로 디멘시아뉴스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우선 이런 매체가 있어서 너무 감사하고요. 치매가 일상적인 문제이고 많은 병 중의 하나이며 우리가 더 많이 케어해야 한다는 공공의식을 확산하는 언론이 돼주시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돌봄과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다양한 정보가 공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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